경북 경주시 남산동 산 55
경주 남산<南山>의 동록 통일전<東麓 統一殿> 북쪽 가까이에 송림<松林>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바로 남쪽에 정강왕릉<定康王陵>이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15.3m, 높이 4.2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는 길이 60-120㎝, 너비 30㎝ 내외의 가공한 장대석<長大石>을 4단<段>으로 쌓은 호석<護石>을 둘렀다. 가장 아랫단 장대석은 지대석<址臺石>처럼 약간 밖으로 내밀게 놓았으나 갑석<甲石>은 덮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호석<護石>의 구조는 이 능<陵> 남쪽에 있는 정강왕릉<定康王陵>과 같은 형식이다. 능<陵>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짠 석상<石床>이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놓이지 않았다. 이 능<陵>은 일찍이 도굴<盜掘>의 피해를 입어 1993년 우기<雨期>에 석실 개석<石室 蓋石>과 벽 일부가 내려앉아 내부의 긴급 수습조사를 거쳐 복원되었다. 조사 결과 석실<石室>은 평면 방형<方形>에 궁륭상천정<穹륭狀天井>이었으며, 남쪽으로 난 연도<선도>는 석실 동쪽으로 편재<편재>되어 있었다. 석실<석실> 서벽<서벽>에 붙여 1대의 1인용 시상<시상>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석제 두침<石製 頭枕>과 족좌<足座>가 출토되었다. 부장품<副葬品>은 모두 도굴되었으나 인화문토기편<印花紋土器片>이 약간 수습되었다. 그런데 석실<石室>의 구조나 토기<土器>는 8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 형식<形式>이어서 헌강왕<憲康王>의 재위시기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재위<在位> 875-886)은 본명이 김정<金晸>이고 경문왕<景文王>의 장자이며, 왕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이 왕<王> 때 백성의 집은 지붕을 갈대로 덮지 않고 기와로 덮었으며, 밥을 짓는 데는 나무를 쓰지 않고 숯으로 지었으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본왕<日本王>이 사신을 보내 황금<黃金> 등을 바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886년 7월에 왕<王>이 죽자 시호<諡號>를 헌강<憲康>이라 하고, 보제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경주 남산<南山>의 동록 통일전<東麓 統一殿> 북쪽 가까이에 송림<松林>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바로 남쪽에 정강왕릉<定康王陵>이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15.3m, 높이 4.2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는 길이 60-120㎝, 너비 30㎝ 내외의 가공한 장대석<長大石>을 4단<段>으로 쌓은 호석<護石>을 둘렀다. 가장 아랫단 장대석은 지대석<址臺石>처럼 약간 밖으로 내밀게 놓았으나 갑석<甲石>은 덮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호석<護石>의 구조는 이 능<陵> 남쪽에 있는 정강왕릉<定康王陵>과 같은 형식이다. 능<陵>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짠 석상<石床>이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놓이지 않았다. 이 능<陵>은 일찍이 도굴<盜掘>의 피해를 입어 1993년 우기<雨期>에 석실 개석<石室 蓋石>과 벽 일부가 내려앉아 내부의 긴급 수습조사를 거쳐 복원되었다. 조사 결과 석실<石室>은 평면 방형<方形>에 궁륭상천정<穹륭狀天井>이었으며, 남쪽으로 난 연도<선도>는 석실 동쪽으로 편재<편재>되어 있었다. 석실<석실> 서벽<서벽>에 붙여 1대의 1인용 시상<시상>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석제 두침<石製 頭枕>과 족좌<足座>가 출토되었다. 부장품<副葬品>은 모두 도굴되었으나 인화문토기편<印花紋土器片>이 약간 수습되었다. 그런데 석실<石室>의 구조나 토기<土器>는 8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 형식<形式>이어서 헌강왕<憲康王>의 재위시기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재위<在位> 875-886)은 본명이 김정<金晸>이고 경문왕<景文王>의 장자이며, 왕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이 왕<王> 때 백성의 집은 지붕을 갈대로 덮지 않고 기와로 덮었으며, 밥을 짓는 데는 나무를 쓰지 않고 숯으로 지었으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본왕<日本王>이 사신을 보내 황금<黃金> 등을 바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886년 7월에 왕<王>이 죽자 시호<諡號>를 헌강<憲康>이라 하고, 보제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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