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 8
신라 제32대 효소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둘레 47.5m, 높이 15m이며 나비 40~50cm의 벽돌모양으로 생긴 돌로 정연하게 호석을 쌓았는데 호석 높이는 1m 가량된다. 약 2m 간격으로 큰 돌로 호석을 둘러가며 기대어 놓았는데 큰 돌의 크기는 둘레가 35cm, 높이 90cm가 되는 자연석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8효소왕조에 효소왕이 돌아가자 현 배반동에 소재한 만덕사지의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되는 31대 신문왕릉은 가공석으로 호석을 짜 놓은 거대한 능이고 동생되는 성덕왕릉 또한 화려하고 장엄한 능인데 비해 너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덤앞에 있는 혼유석도 빈약하며 통일신라기의 왕릉으로는 생각할 수 없어 효소왕릉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즉 지금의 효소왕릉은 현재의 망덕사지의 남맘동 방향의 약 8km 거리에 해당하므로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과 틀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망덕사터에서 동으로 200m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신문왕릉이 효소왕릉일 것이며 대신 신문왕릉은 경주 낭산에 있는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동편으로 약 250m 거리에 있었다는 견해이다.
이 왕릉은 모두 두번의 도굴을 당하였는데 1929년 4월과 1969년 11월 8일이다. 69년의 도굴은 새벽 1시부터 4시까지 3시간동안 4~5명의 도굴꾼이 왕릉 후면에 평지에서 70cm 크기로 5m 정도 파들어가 다시 수직으로 1m50cm를 뚫어 석실 중간지점에 도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으며 당시 확인된 석실의 규모는 길이 3m, 폭 1.5m, 높이 1.5m 정도의 크기로 확인되었다. 능에 사용된 돌은 화강석이었으며 벽의 두께는 약 30cm 정도였다. 당시 관리인이었던 조양동 김봉식(당시 53세)씨의 집과는 700m 떨어져 있었으며 연간 천원의 관리비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효소왕(?~702, 687~702)
신라 제32대왕. 재위 692∼702,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이홍(理洪), 자는 이공(理恭), 신뭉왕의 태자, 어머니는 김흠운(金欽運)의 딸 신목왕후 김씨(神穆王后 金氏)이다. 태어난 해가 불명이라지만 <삼국사기> 신문왕조에는 신문왕 7년(687) 2월에 원자(元子)가 탄생하였다고 하였고 효소왕조에는 왕의 이름을 이홍이라 하며, 신문왕의 태자이며 어머니가 김흠운의 딸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어 효소왕이 즉위한 해가 629년이고 보면 5살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 셈이 된다.
즉위하던 해에 대아찬(大阿餐) 원선(元宣)을 집사부(執事部) 중시(中侍)에 임명하여 국정을 위임하였는데 이러한, 어려서 즉위한 효소왕의 유약함과 왕자가 없음을 이유로 700년에는 이찬(李餐)), 경영(慶永, 혹은 慶玄)의 반란이 있었으며 이 일로 인해 698년에 임명된 중시 순원(順元)이 파면되기도 한다. 그러나 고승 도증(道證)이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천문도(天文圖)를 왕에게 바쳤으니, 천문도는 고구려에 전래된 진탁(陣卓)의 성도(星圖)와 같은 것으로서 왕실권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이 무렵 의학교육기관인 의학(醫學)을 설립하여 의학박사를 두고「본초경(本草經),「침경(鍼經)」,「맥경(脈經)」등의 의학서를 교소하게 하였으며, 695년에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을 두었는데 이것은 22대 지증왕대에 설치된 동시전(東市典)과 더불어 왕경(王京)의 3대 시전으로서 문화의 유통을 쉽게 하였다. 698년에는 일본에, 69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양국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기도 하였다.
신라 제32대 효소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둘레 47.5m, 높이 15m이며 나비 40~50cm의 벽돌모양으로 생긴 돌로 정연하게 호석을 쌓았는데 호석 높이는 1m 가량된다. 약 2m 간격으로 큰 돌로 호석을 둘러가며 기대어 놓았는데 큰 돌의 크기는 둘레가 35cm, 높이 90cm가 되는 자연석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8효소왕조에 효소왕이 돌아가자 현 배반동에 소재한 만덕사지의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되는 31대 신문왕릉은 가공석으로 호석을 짜 놓은 거대한 능이고 동생되는 성덕왕릉 또한 화려하고 장엄한 능인데 비해 너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덤앞에 있는 혼유석도 빈약하며 통일신라기의 왕릉으로는 생각할 수 없어 효소왕릉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즉 지금의 효소왕릉은 현재의 망덕사지의 남맘동 방향의 약 8km 거리에 해당하므로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과 틀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망덕사터에서 동으로 200m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신문왕릉이 효소왕릉일 것이며 대신 신문왕릉은 경주 낭산에 있는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동편으로 약 250m 거리에 있었다는 견해이다.
이 왕릉은 모두 두번의 도굴을 당하였는데 1929년 4월과 1969년 11월 8일이다. 69년의 도굴은 새벽 1시부터 4시까지 3시간동안 4~5명의 도굴꾼이 왕릉 후면에 평지에서 70cm 크기로 5m 정도 파들어가 다시 수직으로 1m50cm를 뚫어 석실 중간지점에 도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으며 당시 확인된 석실의 규모는 길이 3m, 폭 1.5m, 높이 1.5m 정도의 크기로 확인되었다. 능에 사용된 돌은 화강석이었으며 벽의 두께는 약 30cm 정도였다. 당시 관리인이었던 조양동 김봉식(당시 53세)씨의 집과는 700m 떨어져 있었으며 연간 천원의 관리비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효소왕(?~702, 687~702)
신라 제32대왕. 재위 692∼702,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이홍(理洪), 자는 이공(理恭), 신뭉왕의 태자, 어머니는 김흠운(金欽運)의 딸 신목왕후 김씨(神穆王后 金氏)이다. 태어난 해가 불명이라지만 <삼국사기> 신문왕조에는 신문왕 7년(687) 2월에 원자(元子)가 탄생하였다고 하였고 효소왕조에는 왕의 이름을 이홍이라 하며, 신문왕의 태자이며 어머니가 김흠운의 딸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어 효소왕이 즉위한 해가 629년이고 보면 5살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 셈이 된다.
즉위하던 해에 대아찬(大阿餐) 원선(元宣)을 집사부(執事部) 중시(中侍)에 임명하여 국정을 위임하였는데 이러한, 어려서 즉위한 효소왕의 유약함과 왕자가 없음을 이유로 700년에는 이찬(李餐)), 경영(慶永, 혹은 慶玄)의 반란이 있었으며 이 일로 인해 698년에 임명된 중시 순원(順元)이 파면되기도 한다. 그러나 고승 도증(道證)이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천문도(天文圖)를 왕에게 바쳤으니, 천문도는 고구려에 전래된 진탁(陣卓)의 성도(星圖)와 같은 것으로서 왕실권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이 무렵 의학교육기관인 의학(醫學)을 설립하여 의학박사를 두고「본초경(本草經),「침경(鍼經)」,「맥경(脈經)」등의 의학서를 교소하게 하였으며, 695년에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을 두었는데 이것은 22대 지증왕대에 설치된 동시전(東市典)과 더불어 왕경(王京)의 3대 시전으로서 문화의 유통을 쉽게 하였다. 698년에는 일본에, 69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양국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기도 하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