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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신문왕릉 - 삼국통일 이후의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정비하는데 주력...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북 경주시 배반동 453-1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의 동쪽에 송림<松林>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9.3m, 높이 7.6m인 이 왕릉<王陵>의 호석<護石>은 무열왕릉<武烈王陵> 형식에서 한단계 발전한 모습이다. 봉토의 아래에 벽돌 모양으로 가공한 석재들을 오단<五段> 정도 돌려쌓고, 그 이에 갑석<甲石>을 덮은 호석<護石>에 단면 사각형으로 가공한 석재를 수십개 돌려 받쳐주고 있다. 이와 같은 호석<護石> 구조는 무열왕릉<武烈王陵> 형식에서 성덕왕릉<聖德王陵> 형식으로 발전하여 가는 중간 형식이다. 호석 받침돌 가운데 남쪽을 향하고 있는 석재에서 '문<門>'이라고 음각된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 뜻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호석 밖에 난간<欄干> 장식이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등은 보이지 않으며, 그의 석사자<石獅子>·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의 배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왕릉<王陵>의 호석은 일부가 땅 속에 묻혀 있었으나 1970년대에 원형을 복원하고 철책을 둘러서 보호하고 있다. 왕릉<王陵>의 동쪽에는 석상<石床>이 있는데 성덕왕릉<聖德王陵>의 석상에 비해 비교적 얕고, 석재도 고르지 못하여 원래의 석상인지 의심스럽다.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재위 681-692)은 본명이 김정명<金政明>(혹은 김명지<金明之>)이며,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장자<長子>이다. 재위기간 동안 삼국통일 이후의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정비하는데 주력하였으며, 685년 구주<九州>를 완전히 정비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92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능<陵>은 낭산<浪山>의 남쪽 방향에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망덕사<亡德寺> 동쪽에 있다고 한 효소왕릉<孝昭王陵>과 그 위치가 부합되므로 이 능<陵>은 효소왕릉<孝昭王陵>이며, 신문왕릉<神文王陵>은 낭산<浪山> 동쪽인 황복사지<皇福寺址> 아래쪽에 십이지석<十二支石>이 남아 있는 폐왕릉<廢王陵>일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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