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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진흥왕릉 - 신라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왕으로 기록되는 진흥왕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

경주의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에 있으며 무열왕릉<武烈王陵> 서북쪽에 위치한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0m, 높이 5.8m이다. 봉분 밑에 호석<護石>을 받쳤던 자연석 받침돌 몇 개만 나와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없다. 위치와 호석<護石>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재위<在位> 540-576)은 본명이 삼맥종<三麥宗>(심맥부<深麥夫>)이며, 법흥왕<法興王>의 아우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로서 왕비는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진흥왕은 신라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왕으로 기록되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칭할 정도로 불교<佛敎>에 의지하였다. 재위기간인 서기 544년에 흥륜사<興輪寺>를, 553년에는 황룡사<皇龍寺>를 창건하였다. 또한 551년에는 한강유역에 진출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지대를 점령하여 그곳에 한산주<漢山州>를 설치하고 555년에 북한산<北漢山>을 순시한 후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건립하였다. 년호<年號>도 551년에 개국<開國>, 568년에 대창<大昌>, 572년에 홍제<鴻濟>라 바꾸면서 신라의 독자성을 표시하였다. 또한 576년에는 화랑<花郞>의 전신인 원화<源花>를 만들어 화랑으로 계승하게 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576년 8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했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진흥왕릉<眞興王陵>은 법흥왕릉<法興王陵>과 함께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있었다는 것인데, 현재 전하고 있는 법흥왕릉<法興王陵>과 진흥왕릉<眞興王陵>은 선도산<仙桃山>을 사이에 두고 정반대편에 2㎞ 이상 떨어져 있어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 릉<陵>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삼국시대 신라 왕릉<新羅 王陵>으로서는 규모도 너무 작은 편이다. 따라서 진흥왕릉<眞興王陵>은 이 릉<陵>이 아니라 무열왕릉<武烈王陵> 뒤에 도열한 4기의 대형 고분 가운데 위에서 두 번째 고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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