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효현동 63
경주의 서악<西岳>이라 불리는 선도산<仙桃山> 서쪽 기슭에서 뻗은 낮은 구릉의 송림<松林> 속에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삼국시대 신라 왕릉<新羅 王陵>으로서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봉분의 표면이나 주위에는 아무런 장식물이 없으나, 봉분 아래에 자연석의 일각이 드문드문 드러나 있다. 이것은 호석<護石>을 받쳤던 자연석 받침돌로, 선도산<仙桃山> 동쪽 기슭의 무열왕릉<武烈王陵>과 같은 구조의 호석<護石>이 축조된 것이다. 이러한 호석 구조는 경주시내 평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보다 한단계 발전한 것이며,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23세 법흥왕<法興王>(재위<在位> 514-540)은 본명이 원종<原宗>이며, 지증왕<智證王>의 아들이고 왕비는 보도부인<保刀夫人>이다. 재위기간인 서기 520년에 관리들의 복장을 법률로 정했고, 521년에는 중국 양<梁>나라와 통교했으며, 또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금관국<金官國>을 점령하였다. 특히 528년에는 불교<佛敎>를 국교로 수용하여 신라<新羅> 호국불교<護國佛敎>의 기틀을 닦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재위 27년만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도 애공사 북쪽에 법흥왕릉<法興王陵>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의 법흥왕릉 남쪽에 신라<新羅> 하대<下代>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는데 이를 애공사지탑<哀公寺址塔>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법흥왕릉<法興王陵>은 이 릉<陵>이 아니라 선도산 동쪽 기슭 무열왕릉 뒤편에 도열한 4기의 대형 고분 가운데 가장 위쪽에 있는 고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경주의 서악<西岳>이라 불리는 선도산<仙桃山> 서쪽 기슭에서 뻗은 낮은 구릉의 송림<松林> 속에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삼국시대 신라 왕릉<新羅 王陵>으로서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봉분의 표면이나 주위에는 아무런 장식물이 없으나, 봉분 아래에 자연석의 일각이 드문드문 드러나 있다. 이것은 호석<護石>을 받쳤던 자연석 받침돌로, 선도산<仙桃山> 동쪽 기슭의 무열왕릉<武烈王陵>과 같은 구조의 호석<護石>이 축조된 것이다. 이러한 호석 구조는 경주시내 평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보다 한단계 발전한 것이며,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23세 법흥왕<法興王>(재위<在位> 514-540)은 본명이 원종<原宗>이며, 지증왕<智證王>의 아들이고 왕비는 보도부인<保刀夫人>이다. 재위기간인 서기 520년에 관리들의 복장을 법률로 정했고, 521년에는 중국 양<梁>나라와 통교했으며, 또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금관국<金官國>을 점령하였다. 특히 528년에는 불교<佛敎>를 국교로 수용하여 신라<新羅> 호국불교<護國佛敎>의 기틀을 닦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재위 27년만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도 애공사 북쪽에 법흥왕릉<法興王陵>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의 법흥왕릉 남쪽에 신라<新羅> 하대<下代>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는데 이를 애공사지탑<哀公寺址塔>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법흥왕릉<法興王陵>은 이 릉<陵>이 아니라 선도산 동쪽 기슭 무열왕릉 뒤편에 도열한 4기의 대형 고분 가운데 가장 위쪽에 있는 고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