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탑동 67
사릉이라고도 하며 모두 6기가 전해오는데 시조혁거세릉ㆍ왕비인 알영부인ㆍ제2대 남해차차웅ㆍ제3대 유리니사금ㆍ제5대 파사니사금 등이 능묘로 전해온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삼국유사』에 실려있다.
박혁거세는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만에 하늘로 올라갔다. 그 후 7일만에 그 유체가 알영정 부근에 떨어졌는데 사지가 다섯으로 나뉘어 흩어져 있었다. 이때 알영왕비도 죽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거서간의 사신을 한데 모아서 장사지내려 하니 큰 뱀이 나타나서 이를 방해하였으므로 사지가 흩어져 있는대로 그 자리에 장사를 지내서 오릉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변(蛇變)으로 오릉이 되었다 하여 이 능력(陵域)을 사릉원(蛇陵園)이라 부르기도 한다.
왕릉의 전체적인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제1릉은 가장 남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10미터로 5기 가운데 가장 높고 크다.
제2릉은 제1릉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9미터이다. 제3릉은 제2릉의 동쪽에 표주박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높이는 약 7.2미터이다. 제4릉은 제2릉의 서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3.6미터이다. 제5릉은 제4릉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약 1.8미터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실시된 바가 없어 각 능의 피장자를 알 수 없으나, 경주일대에서 4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원형봉토분의 존재가 확인되지 못하여 현재 알려진 피장자와 직접 연관시키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오릉은 그 위치와 봉분의 구조로 보아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남쪽의 1기는 표형분(飄形墳)의 형태를 하고 있다. 실제로 이 능역에는 6기의 왕릉이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봉분의 규모 또한 혁거세거서간의 능이라고 추정되는 고분만이 대형일 뿐 나머지는 소형의 고분들로서 왕릉으로 보기에는 의심이 간다.
즉, 중고기에 적석목곽분이 평지를 떠날 당시에 조영된 것으로 왕릉 1기에 나머지 5기는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사릉이라고도 하며 모두 6기가 전해오는데 시조혁거세릉ㆍ왕비인 알영부인ㆍ제2대 남해차차웅ㆍ제3대 유리니사금ㆍ제5대 파사니사금 등이 능묘로 전해온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삼국유사』에 실려있다.
박혁거세는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만에 하늘로 올라갔다. 그 후 7일만에 그 유체가 알영정 부근에 떨어졌는데 사지가 다섯으로 나뉘어 흩어져 있었다. 이때 알영왕비도 죽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거서간의 사신을 한데 모아서 장사지내려 하니 큰 뱀이 나타나서 이를 방해하였으므로 사지가 흩어져 있는대로 그 자리에 장사를 지내서 오릉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변(蛇變)으로 오릉이 되었다 하여 이 능력(陵域)을 사릉원(蛇陵園)이라 부르기도 한다.
왕릉의 전체적인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제1릉은 가장 남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10미터로 5기 가운데 가장 높고 크다.
제2릉은 제1릉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9미터이다. 제3릉은 제2릉의 동쪽에 표주박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높이는 약 7.2미터이다. 제4릉은 제2릉의 서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3.6미터이다. 제5릉은 제4릉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약 1.8미터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실시된 바가 없어 각 능의 피장자를 알 수 없으나, 경주일대에서 4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원형봉토분의 존재가 확인되지 못하여 현재 알려진 피장자와 직접 연관시키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오릉은 그 위치와 봉분의 구조로 보아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남쪽의 1기는 표형분(飄形墳)의 형태를 하고 있다. 실제로 이 능역에는 6기의 왕릉이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봉분의 규모 또한 혁거세거서간의 능이라고 추정되는 고분만이 대형일 뿐 나머지는 소형의 고분들로서 왕릉으로 보기에는 의심이 간다.
즉, 중고기에 적석목곽분이 평지를 떠날 당시에 조영된 것으로 왕릉 1기에 나머지 5기는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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