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동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닷 속에 있다. 봉길리 앞 바다 물 속에 솟은 바위인 대왕암이 그것. 대왕암 위에 올라가 보면 가운데에 넓은 공간이 있다. 그 동서남북 사방으로 수로(水路)를 내어 맑은 바닷물이 파도를 따라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로 들어오고 서쪽 수로로 나가도록 돼있다. 그래서 큰 파도가 쳐도 안쪽 공간은 수면이 언제나 잔잔하게 유지된다. 가운데의 넓은 공간에는 넓적하고도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다. 길이 3.6m·너비 2.85m·두께 0.9m의 거북 모양의 화강암석이다.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된다. 이 돌 밑에 어떤 특별한 장치를 해서 문무대왕 유골을 봉안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돌 밑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어떠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왕암에서 중앙의 장골처(藏骨處)를 중심으로 사방에 수로를 설치한 것은 부처의 사리를 안치한 사리탑 형식과 비교되기도 한다. 사방에 문이 마련되어 있는 인도탑(印度塔)의 경우나 백제의 미륵사탑(彌勒寺塔) 하부에 4방으로 통로를 마련한 것과 같은 불탑의 형식이 이 대왕암에 적용되어 사방에 수로를 마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 661-681)은 본명이 김법인(金法敏)이고, 무열왕(武烈王)의 맏아들로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의 영주.
삼국사기에 681년 7월 왕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문무(文武)라 하고, 왕의 유언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불식(佛式)으로 화장하여 동해구(東海口) 대석상(大石上)에 장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왕이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는 유지를 받든 것으로 신라 사람들은 왕이 용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대석(大石)을 대왕석(大王石)이라 했다한다. 문무왕(文武王)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은 동해변에 감은사를 창건하고 금당(金堂)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뚫어 동해의 조수(潮水)가 금당 밑까지 들어오게 했다. 이는 동해의 용이 된 부왕(父王)이 조수를 따라 금당까지 들어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인근 해변에 이견대지(利見臺址)가 있다. 신문왕이 여기서 대왕암을 망배(望拜)한 곳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