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산시 사사동 산111
한응인(1554∼1614)은 조선 선조대(宣祖代)에 활약하던 문신으로, 초서<草書>에 뛰어났고 네 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다.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졸재<百拙齋>·유촌<柳村>이고, 본관은 청주,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보호하라는 선조유교칠신<宣祖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서 예조판서<禮曹判書>·우찬성<右贊成>·우의정에 오르고 평난공신<平難功臣>을 비롯해 네번이나 공신에 책록되기도 하였지만,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견본<絹本>에 그려진 이 초상화는 91.5㎝×164㎝ 크기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유행한 전형적인 공신도 형식의 작품이다. 이와 유사한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산해상<李山海像>이나 보물 제487호인 정탁상<鄭琢像>등이 있다. 오사모<烏紗帽>를 쓴 정장 관복으로 얼굴과 몸을 왼쪽으로 향한 전신좌안칠분면의좌상<全身左顔七分面椅坐像>이다. 두 손을 관복 속에 결한 단정한 모습을 보인다. 사모가 높고, 흉배는 파도 위에 쌍학이 나는 형상에 금채<金彩>를 가하여 화려한 분위기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며, 각대는 1품 이상만 두르는 서대<犀帶>를 갖추고 있어 문관 종1품인 우찬성때의 모습으로 생각된다. 얼굴은 가는 붓으로 살아 있는 듯이 이목구비를 섬세하게 그렸으며, 눈썹과 수염은 훈염법(움푹한 곳은 붓질을 거듭하여 어두운 느낌을 주고, 도드라진 부분은 붓질을 덜 하여 밝은 느낌을 주는 그림 기법)을 사용하였다. 초상화를 봉안하였던 사당 안에는 17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제흑칠제구<木製黑漆祭具>가 여러 점 남아 있는데, 종류는 교의<交椅>(죽은 이의 위패 등을 모셔 두는 의자처럼 생긴 기구) 2점, 주독<主독>(죽은 이의 위패, 즉 신주를 넣어 두는 패)과 신주 1점, 제상 2점, 향로상 1점, 모사상<茅砂床>(제사 지낼 때 신이 내리게 하기 위해 술을 붓는, 띠 묶음과 모래가 담긴 그릇을 올려 두는 상) 2점 등이다. 이는 이성지<李成之>의『재물보<才物譜>』에 소개된 제례용구<祭禮用具>의 내용과도 부합된다. 이들 제구는 조선 후기 목제구 연구에 기준이 될 만한 중요한 자료들이다.
한응인(1554∼1614)은 조선 선조대(宣祖代)에 활약하던 문신으로, 초서<草書>에 뛰어났고 네 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다.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졸재<百拙齋>·유촌<柳村>이고, 본관은 청주,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보호하라는 선조유교칠신<宣祖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서 예조판서<禮曹判書>·우찬성<右贊成>·우의정에 오르고 평난공신<平難功臣>을 비롯해 네번이나 공신에 책록되기도 하였지만,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견본<絹本>에 그려진 이 초상화는 91.5㎝×164㎝ 크기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유행한 전형적인 공신도 형식의 작품이다. 이와 유사한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산해상<李山海像>이나 보물 제487호인 정탁상<鄭琢像>등이 있다. 오사모<烏紗帽>를 쓴 정장 관복으로 얼굴과 몸을 왼쪽으로 향한 전신좌안칠분면의좌상<全身左顔七分面椅坐像>이다. 두 손을 관복 속에 결한 단정한 모습을 보인다. 사모가 높고, 흉배는 파도 위에 쌍학이 나는 형상에 금채<金彩>를 가하여 화려한 분위기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며, 각대는 1품 이상만 두르는 서대<犀帶>를 갖추고 있어 문관 종1품인 우찬성때의 모습으로 생각된다. 얼굴은 가는 붓으로 살아 있는 듯이 이목구비를 섬세하게 그렸으며, 눈썹과 수염은 훈염법(움푹한 곳은 붓질을 거듭하여 어두운 느낌을 주고, 도드라진 부분은 붓질을 덜 하여 밝은 느낌을 주는 그림 기법)을 사용하였다. 초상화를 봉안하였던 사당 안에는 17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제흑칠제구<木製黑漆祭具>가 여러 점 남아 있는데, 종류는 교의<交椅>(죽은 이의 위패 등을 모셔 두는 의자처럼 생긴 기구) 2점, 주독<主독>(죽은 이의 위패, 즉 신주를 넣어 두는 패)과 신주 1점, 제상 2점, 향로상 1점, 모사상<茅砂床>(제사 지낼 때 신이 내리게 하기 위해 술을 붓는, 띠 묶음과 모래가 담긴 그릇을 올려 두는 상) 2점 등이다. 이는 이성지<李成之>의『재물보<才物譜>』에 소개된 제례용구<祭禮用具>의 내용과도 부합된다. 이들 제구는 조선 후기 목제구 연구에 기준이 될 만한 중요한 자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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