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386
이 그림은 오음 윤두수(梧陰 尹斗壽>(1533∼1601)가 연안부사<延安府使>로 재직할 당시, 10년 전인 조선 선조<宣祖> 4년(1571) 황해도 관찰사<觀察使> 부임 당시를 회상하며 그린 것으로, 그림 오른쪽에 칠언시<七言詩> 56자를 쓰고 끝에 연대와 인장을 찍었다. 그리고 당시 배행<陪行>하였던 영사<營使> 24인의 이름·소속·직명 등을 적고 있다. 그림 상단의 '유영수양관 연명지도<留營首陽館 延命之圖>'란 전서체의 제명은 그의 아우 윤근수<尹根壽>(1537∼1616)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수양관 전경과 관찰사 행차시 행렬 의식 등이 채색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원래 영사공관<營使公館>인 수양관 연청에 소장되어 전해졌는데, 그 후 영조<英祖> 13년(1737) 오음의 6대손인 윤득화<尹得和>(1688∼1759)가 그림과 글씨를 보고, 그림에 대한 유래 등을 서술하였으며, 선조<宣祖>의 사례에 따라 자신을 배행한 영사 29명의 소속과 직명, 그리고 이름을 함께 기재하였다. 또 영조 44년에 6대손 윤득양과 순조<純祖> 3년(1803)에 8대손 윤정렬, 그리고 순조 14년에 8대손 윤욱렬이 역조<歷祖>의 그림과 글씨를 보았음을 적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하여 16세기 초 황해도 감영의 공청인 선화당<宣和堂>의 전경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산의 묘사에 단선점준<短線點>(점이나 짧은 선의 형태로 산·언덕·바위 등의 입체감·명암·질감 등을 표현하는 회화 기법)이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조선 전기에 유행하였던 안견<安堅>파 화풍의 영향도 볼 수 있다. 비록 생전에 그려진 원본은 아니지만, 조선 전기 작품이 드문 현재로서는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 그림은 오음 윤두수(梧陰 尹斗壽>(1533∼1601)가 연안부사<延安府使>로 재직할 당시, 10년 전인 조선 선조<宣祖> 4년(1571) 황해도 관찰사<觀察使> 부임 당시를 회상하며 그린 것으로, 그림 오른쪽에 칠언시<七言詩> 56자를 쓰고 끝에 연대와 인장을 찍었다. 그리고 당시 배행<陪行>하였던 영사<營使> 24인의 이름·소속·직명 등을 적고 있다. 그림 상단의 '유영수양관 연명지도<留營首陽館 延命之圖>'란 전서체의 제명은 그의 아우 윤근수<尹根壽>(1537∼1616)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수양관 전경과 관찰사 행차시 행렬 의식 등이 채색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원래 영사공관<營使公館>인 수양관 연청에 소장되어 전해졌는데, 그 후 영조<英祖> 13년(1737) 오음의 6대손인 윤득화<尹得和>(1688∼1759)가 그림과 글씨를 보고, 그림에 대한 유래 등을 서술하였으며, 선조<宣祖>의 사례에 따라 자신을 배행한 영사 29명의 소속과 직명, 그리고 이름을 함께 기재하였다. 또 영조 44년에 6대손 윤득양과 순조<純祖> 3년(1803)에 8대손 윤정렬, 그리고 순조 14년에 8대손 윤욱렬이 역조<歷祖>의 그림과 글씨를 보았음을 적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하여 16세기 초 황해도 감영의 공청인 선화당<宣和堂>의 전경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산의 묘사에 단선점준<短線點>(점이나 짧은 선의 형태로 산·언덕·바위 등의 입체감·명암·질감 등을 표현하는 회화 기법)이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조선 전기에 유행하였던 안견<安堅>파 화풍의 영향도 볼 수 있다. 비록 생전에 그려진 원본은 아니지만, 조선 전기 작품이 드문 현재로서는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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