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여주군 점동면 원부리
조선 전기의 문신 사암<思菴> 정대년(1507∼1578)의 신도비이다. 연꽃무늬·영지 무늬를 새긴 대석 위에 비신과 이수<이首>를 얹었는데 조각 수법이 평면적이다. 신도비는 손자 정호가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이 지은 비문을 새기려 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실행치 못하다가 뒤에 증손 양우·양필 형제가 병조참판<兵曹參判>오준<吳竣>의 글씨와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조선시대 궁중의 학술 관부이자 왕의 자문 기관이던 홍문관의 정3품 벼슬) 김광현<金光炫>의 두전<頭篆>을 받아 세웠다. 이 사실과 함께 자손 170명의 명단을 적은 뒷면의 추기<追記>는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정양필이 적고 예조정랑(<禮曹正郞>: 예의·제사·외교·과거 등의 일을 관장하던 예조의 정5품 벼슬) 유시영이 썼다. 비문에는 정대년의 성장 과정과 관직생활, 그리고 간소한 생활 등이 적혀 있으며, 이어 부인의 집안과 성품 및 자손들에 대해 약술되어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 사암<思菴> 정대년(1507∼1578)의 신도비이다. 연꽃무늬·영지 무늬를 새긴 대석 위에 비신과 이수<이首>를 얹었는데 조각 수법이 평면적이다. 신도비는 손자 정호가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이 지은 비문을 새기려 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실행치 못하다가 뒤에 증손 양우·양필 형제가 병조참판<兵曹參判>오준<吳竣>의 글씨와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조선시대 궁중의 학술 관부이자 왕의 자문 기관이던 홍문관의 정3품 벼슬) 김광현<金光炫>의 두전<頭篆>을 받아 세웠다. 이 사실과 함께 자손 170명의 명단을 적은 뒷면의 추기<追記>는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정양필이 적고 예조정랑(<禮曹正郞>: 예의·제사·외교·과거 등의 일을 관장하던 예조의 정5품 벼슬) 유시영이 썼다. 비문에는 정대년의 성장 과정과 관직생활, 그리고 간소한 생활 등이 적혀 있으며, 이어 부인의 집안과 성품 및 자손들에 대해 약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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