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동천동 4
서방정토를 표방하는 사면불(四面佛)의 불상 배치를 살펴보면, 거대한 암석의 서면(西面)에는 서방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본존을 부조하고 그 양협시보살인 관음과 대세지를 환조로 별조(別造)하여 세워 놓았고, 동면(東面)에는 약함을 손에 얹어 놓은 약사여래좌상이 부조되었으며, 남면(南面)에는 여래입상과 보살입상이 각 1체가 부조되었고 우협시로 추정되는 불상은 전부 박탈되어 형체를 알 수 없다.
북면(北面)에는 부조로된 미륵보살입상 1체와 선각으로 표현한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 관음보살이 있으나 그 형체를 육안으로 확인하기에는 너무 많이 마멸되어져 있다.
이 사면석불(四面石佛)은 기록과 부합되는 조상(彫像)이 그대로 있음으로해서, 편년(編年)과 조형연구에 있어서 시대적 기준이 되기 때문에 신라불상 조각연구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면석불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돋을 새김으로 다른 불상들보다 크게 조각해 놓은 서면(西面)의 아미타 불상은 머리를 별개의 돌로 환조하여 얹어 놓았고, 오른팔이 떨어져 나간채 손은 남아있다. 법의(法衣)는 양어깨에 걸쳐서 앞에는 U자형의 주름이 계단식으로 조각되었는데, 그 표현이 좀 딱딱한 편이다.
양협시 보살상은 독립된 돌에다 환조하여 세워 놓았는데 오른쪽 보살의 윗부분은 파괴되었고 왼쪽 보살은 삼굴자세(三屈)를 취하고 있다.
보살의 몸에는 목걸이와 X자형으로 교차된 달개장식이 있으며, 천의나 裳衣의 표현은 매우 자연스럽고, 주존인 아미타 불상에서 보다 더욱 세련된 조각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좌협시의 관음상은 족(足)부를 별석으로, 우협시인 대세지상은 1석으로 하여 8각의 복판복련위에 얹었고, 본존인 아미타불의 단판 연화문 대좌는 아랫부분이 미완성인 채로 두었다. 남면에 현재 남아있는 보살상과 불상은, 별조한 단판 앙련과 복판복련으로 구성된 단정한 2중 대좌위에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형태의 균형도 잘 잡혀있고 주름이나 몸체의 굴곡표현이 자연스러우며, 역시 세련된 조각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둘다 모두 높은 돋을 새김으로 조각되었는데 머리부분과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고, 보살상은 오른손 부분이 없어졌다.
불상의 모습은 감산사지(甘山寺址) 출토 아미타불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제 82호)과 비슷한 형식의 옷주름을 하고 있는데, 가는 허리와 도드라진 다리의 윤곽이 더 강조되었고, 주름의 처리가 감산사 불상보다 더욱 간략히 처리되면서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사실감이 더해지면서 신체와 법의가 밀착되어 조화있게 표현된 것은 8세기 전반기의 통일신라때 조각양식의 한 특징으로 정리된다.
보살입상 또한 넓은 어깨, 가는 허리 등 팔다리의 윤곽선이 강조되고, 천의가 부드러운 주름을 이루면서 늘어졌는데, 좀 투박하고 도식적인 느낌도 있으나 감산사 미륵보살상에 비하면 훨씬 진전된 조각양식임을 알 수 있다.
사면(四面) 중에서 서면의 아미타여래상은 이들 조각군 중에서는 가장 먼저 제작된 불상으로 짐작되고 있으며, 특히 남면의 불상과 보살상은 8세기 후반 일본 불상양식에서도 나타나는데 특히 나라현(奈良縣)의 도쇼다이사(唐招堤寺)의 목조불상들과 그 양식이 비슷한 점이 발견된다.
서방정토를 표방하는 사면불(四面佛)의 불상 배치를 살펴보면, 거대한 암석의 서면(西面)에는 서방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본존을 부조하고 그 양협시보살인 관음과 대세지를 환조로 별조(別造)하여 세워 놓았고, 동면(東面)에는 약함을 손에 얹어 놓은 약사여래좌상이 부조되었으며, 남면(南面)에는 여래입상과 보살입상이 각 1체가 부조되었고 우협시로 추정되는 불상은 전부 박탈되어 형체를 알 수 없다.
북면(北面)에는 부조로된 미륵보살입상 1체와 선각으로 표현한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 관음보살이 있으나 그 형체를 육안으로 확인하기에는 너무 많이 마멸되어져 있다.
이 사면석불(四面石佛)은 기록과 부합되는 조상(彫像)이 그대로 있음으로해서, 편년(編年)과 조형연구에 있어서 시대적 기준이 되기 때문에 신라불상 조각연구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면석불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돋을 새김으로 다른 불상들보다 크게 조각해 놓은 서면(西面)의 아미타 불상은 머리를 별개의 돌로 환조하여 얹어 놓았고, 오른팔이 떨어져 나간채 손은 남아있다. 법의(法衣)는 양어깨에 걸쳐서 앞에는 U자형의 주름이 계단식으로 조각되었는데, 그 표현이 좀 딱딱한 편이다.
양협시 보살상은 독립된 돌에다 환조하여 세워 놓았는데 오른쪽 보살의 윗부분은 파괴되었고 왼쪽 보살은 삼굴자세(三屈)를 취하고 있다.
보살의 몸에는 목걸이와 X자형으로 교차된 달개장식이 있으며, 천의나 裳衣의 표현은 매우 자연스럽고, 주존인 아미타 불상에서 보다 더욱 세련된 조각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좌협시의 관음상은 족(足)부를 별석으로, 우협시인 대세지상은 1석으로 하여 8각의 복판복련위에 얹었고, 본존인 아미타불의 단판 연화문 대좌는 아랫부분이 미완성인 채로 두었다. 남면에 현재 남아있는 보살상과 불상은, 별조한 단판 앙련과 복판복련으로 구성된 단정한 2중 대좌위에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형태의 균형도 잘 잡혀있고 주름이나 몸체의 굴곡표현이 자연스러우며, 역시 세련된 조각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둘다 모두 높은 돋을 새김으로 조각되었는데 머리부분과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고, 보살상은 오른손 부분이 없어졌다.
불상의 모습은 감산사지(甘山寺址) 출토 아미타불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제 82호)과 비슷한 형식의 옷주름을 하고 있는데, 가는 허리와 도드라진 다리의 윤곽이 더 강조되었고, 주름의 처리가 감산사 불상보다 더욱 간략히 처리되면서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사실감이 더해지면서 신체와 법의가 밀착되어 조화있게 표현된 것은 8세기 전반기의 통일신라때 조각양식의 한 특징으로 정리된다.
보살입상 또한 넓은 어깨, 가는 허리 등 팔다리의 윤곽선이 강조되고, 천의가 부드러운 주름을 이루면서 늘어졌는데, 좀 투박하고 도식적인 느낌도 있으나 감산사 미륵보살상에 비하면 훨씬 진전된 조각양식임을 알 수 있다.
사면(四面) 중에서 서면의 아미타여래상은 이들 조각군 중에서는 가장 먼저 제작된 불상으로 짐작되고 있으며, 특히 남면의 불상과 보살상은 8세기 후반 일본 불상양식에서도 나타나는데 특히 나라현(奈良縣)의 도쇼다이사(唐招堤寺)의 목조불상들과 그 양식이 비슷한 점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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