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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복선생영정 - 얼굴 표현이 사실적이고 섬세한 조영복 선생 초상화

by 넥스루비 2007. 8. 7.
경기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산19

조영복(1672∼1728)은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으로, 동래부사<東來府使>와 충청도감사<忠淸道감사>·경상도감사·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조선시대 서울의 행정·사법을 담당한 한성부의 종2품벼슬)을 지낸 문신으로, 자는 석오<錫五>, 호는 이지당<二知堂>,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현재 그의 초상화는 두 본이 전하고 있는데, 한 본은 사방모<四方帽>에 도포 차림의 전신부좌상<全身趺坐像>으로 120㎝×76.5㎝ 크기이고, 다른 본은 사모에 공복을 입은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크기는 154㎝×80㎝이다. 우선 전자인 유학 복식 차림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아우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 >이 '이지당조공화상<二知堂趙公畵像>'이란 제목 아래 초상화의 내력을 적은 제기가 있다. 이에 따르면 이지당이 영춘<永春>에 유배되었을 때, 아우 조영석이 초본을 그렸다가 영조<英祖> 원년(1725)형이 조정에 돌아온 이후 이 유학 복식 차림의 초상화를 완성하였고, 화사<畵師>진재해<秦再奚>에게는 따로 공복 차림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화가가 각기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 본은 복장만 차이가 날 뿐 거의 동일한 기법을 보이고 있다. 두 본 모두 얼굴과 몸을 왼쪽으로 약간 돌린 자세를 하고 있으며, 유학 복식차림의 초상화의 경우는 양손이 밖으로 나와 있는데, 이는 조선 초상화 중에 보기 드문 것이다. 공복 차림의 초상화는 진재해가 그린 것이 확실한 작품으로 연분홍 관복 위에 관대가 매어져 있으나 흉배가 없고 얼굴의 표현이 사실적이고 섬세하다. 이 그림들은 18세기 전기 초상화 유형과 그 특징들을 잘 보여 주는 것으로, 유학 복식 차림의 경우 조영석이 형의 모습을 너무도 생생하게 그렸던 일이 당시의 대신들 사이에서 이야기되었음이『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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