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북구 용봉동 1004-4
이 상여는 강진읍 서성리<康津邑 西城里>의 김현장<金鉉璋>이 3대째 사용해오던 것으로 1971년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상여의 제작은 1920년 착수하여 1923년 완성시킨 것으로 서울에서 상여제작자 3명을 데려와 만들었다고 한다(나주 양재익의 작품이라고도 함). 나무는 서울에서 사왔다고 하며 공단과 실은 중국 상해<中國 上海>에서 수입했다고 한다. 이 상여는 전통적인 상여와는 달리 2층 목조기와집 형태이다. 지붕은 우진각형태이며, 벽체는 모두 문짝으로 되었는데, 윗부분은 국화문, 아랫부분은 격자문<格子文>을 조각하였다. 문짝 위에는 술을 돌렸다. 2층과 1층사이에는 운각<雲刻>을 돌렸는데 모두 30개의 졸봉판<卒鳳板>과 소룡판<小龍板>을 이용하여 고정시켰다. 운각의 네모서리에는 모두 8개의 대봉판<大鳳板>을 달아 역시 전통상여가 4개인데 비하여 호화로움을 더하고 있다. 대봉판 끝에는 유소<流蘇> 8개를 늘어뜨려 지붕끝의 유소 4개와 어울리도록 하였다. 운각밑에는 붉은색 공단으로 된 보장<寶帳>을 겹으로 돌린후 부전<付錢>을 달았으며, 보장 위에는 술을 돌렸다. 보장 아래부분은 나무로 난간을 만들었으며 칸살위에는 연꽃을 조각하였다. 상여 전후에 각 1개 씩의 용두판이 있는데 한쪽은 청룡이, 다른 한쪽은 황룡이 새겨져 있어 남녀에 관계없이 이 상여를 쓸수 있게 하였다. 단강<短강>은 9개로 되어 한 개에 좌우 두줄씩 상두꾼 36명이 매도록 된 대형 상여다. 맨 위 양장밑으로는 청사초롱을 달았다. 크기는 길이 312cm, 너비 132cm, 높이 220cm이다. 부속자료는 요여<腰輿>와 운삽과 불삽이 있다. 이 상여는 개화기 이후 서민층에 대한 문화적 규제가 사라지면서 발달한 부유층의 화려한 문화유산으로 볼 수 있다.
이 상여는 강진읍 서성리<康津邑 西城里>의 김현장<金鉉璋>이 3대째 사용해오던 것으로 1971년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상여의 제작은 1920년 착수하여 1923년 완성시킨 것으로 서울에서 상여제작자 3명을 데려와 만들었다고 한다(나주 양재익의 작품이라고도 함). 나무는 서울에서 사왔다고 하며 공단과 실은 중국 상해<中國 上海>에서 수입했다고 한다. 이 상여는 전통적인 상여와는 달리 2층 목조기와집 형태이다. 지붕은 우진각형태이며, 벽체는 모두 문짝으로 되었는데, 윗부분은 국화문, 아랫부분은 격자문<格子文>을 조각하였다. 문짝 위에는 술을 돌렸다. 2층과 1층사이에는 운각<雲刻>을 돌렸는데 모두 30개의 졸봉판<卒鳳板>과 소룡판<小龍板>을 이용하여 고정시켰다. 운각의 네모서리에는 모두 8개의 대봉판<大鳳板>을 달아 역시 전통상여가 4개인데 비하여 호화로움을 더하고 있다. 대봉판 끝에는 유소<流蘇> 8개를 늘어뜨려 지붕끝의 유소 4개와 어울리도록 하였다. 운각밑에는 붉은색 공단으로 된 보장<寶帳>을 겹으로 돌린후 부전<付錢>을 달았으며, 보장 위에는 술을 돌렸다. 보장 아래부분은 나무로 난간을 만들었으며 칸살위에는 연꽃을 조각하였다. 상여 전후에 각 1개 씩의 용두판이 있는데 한쪽은 청룡이, 다른 한쪽은 황룡이 새겨져 있어 남녀에 관계없이 이 상여를 쓸수 있게 하였다. 단강<短강>은 9개로 되어 한 개에 좌우 두줄씩 상두꾼 36명이 매도록 된 대형 상여다. 맨 위 양장밑으로는 청사초롱을 달았다. 크기는 길이 312cm, 너비 132cm, 높이 220cm이다. 부속자료는 요여<腰輿>와 운삽과 불삽이 있다. 이 상여는 개화기 이후 서민층에 대한 문화적 규제가 사라지면서 발달한 부유층의 화려한 문화유산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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