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김포시 감정동 492
조헌< 趙憲 >(1544∼1592) 선생은 학자이며 의병장< 義兵將 >으로 자는 여식< 汝式 >, 호는 중봉< 重峯 >이다. 선생은 조응지< 趙應祉 >의 아들로 부모에 대한 효성은 어려서부터 지극했다. 명종< 明宗 > 22년(1567)에 문과< 文科 >에 급제하여 전주교수< 全州敎授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직무를 수행하는 데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시정< 時政 >에서도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상소하곤 하였다. 선조< 宣祖 > 24년(1591)에 일본 사신이 오자 상소를 올려 국방력을 강화하여 왜적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다음해 임진왜란<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옥천< 沃川 >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 靈圭 > 등 승병< 僧兵 >과 합세하여 왜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던 청주성< 淸州城 >을 탈환하였다. 이어 홍성< 洪城 >, 전주< 全州 >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이 진을 치고 있는 금산< 錦山 >으로 향하였다. 이때 호남순찰사< 湖南巡察使 > 권율< 權慄 > 장군< 將軍 >과 합세하기로 하였는데 서로 어긋나게 되자 단독으로 의병 700여 명을 거느리고 금산을 공격했으나 세< 勢 > 부족으로 전원이 전사< 戰死 >하였다. 선생의 뜨거운 구국활동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고경명< 高敬命 >, 김천일< 金千鎰 >, 곽재우< 郭再祐 >와 함께 임진< 壬辰 > 사충신< 四忠臣 >의 하나로 포장< 褒奬 >되었다. 그후 영조< 英祖 > 30년(1754)에는 영의정< 領議政 >으로 추증< 追贈 >되었다.
조헌< 趙憲 >(1544∼1592) 선생은 학자이며 의병장< 義兵將 >으로 자는 여식< 汝式 >, 호는 중봉< 重峯 >이다. 선생은 조응지< 趙應祉 >의 아들로 부모에 대한 효성은 어려서부터 지극했다. 명종< 明宗 > 22년(1567)에 문과< 文科 >에 급제하여 전주교수< 全州敎授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직무를 수행하는 데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시정< 時政 >에서도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상소하곤 하였다. 선조< 宣祖 > 24년(1591)에 일본 사신이 오자 상소를 올려 국방력을 강화하여 왜적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다음해 임진왜란<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옥천< 沃川 >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 靈圭 > 등 승병< 僧兵 >과 합세하여 왜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던 청주성< 淸州城 >을 탈환하였다. 이어 홍성< 洪城 >, 전주< 全州 >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이 진을 치고 있는 금산< 錦山 >으로 향하였다. 이때 호남순찰사< 湖南巡察使 > 권율< 權慄 > 장군< 將軍 >과 합세하기로 하였는데 서로 어긋나게 되자 단독으로 의병 700여 명을 거느리고 금산을 공격했으나 세< 勢 > 부족으로 전원이 전사< 戰死 >하였다. 선생의 뜨거운 구국활동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고경명< 高敬命 >, 김천일< 金千鎰 >, 곽재우< 郭再祐 >와 함께 임진< 壬辰 > 사충신< 四忠臣 >의 하나로 포장< 褒奬 >되었다. 그후 영조< 英祖 > 30년(1754)에는 영의정< 領議政 >으로 추증< 追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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