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여주군 여주읍 하1∼3리 199-1
대로사비< 大老祠碑 >는 조선< 朝鮮 > 중기< 中期 >의 거유< 巨儒 >인 송시열< 宋時烈 >(1607∼1689) 선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정조< 正祖 > 11년(1787)에 세운 것이다. 선생의 자는 영보< 英甫 >, 호는 우암< 尤庵 >, 시호< 諡號 >는 문정< 文正 >이고 본관< 本貫 >은 은진< 恩津 >으로 송갑조< 宋甲祚 >의 3남이다. 인조< 仁祖 > 11년(1633)에 사마시< 司馬試 >에 합격하고 경릉참봉< 敬陵參奉 >이 되었다가 2년 후(1635)에는 봉림대군< 鳳林大君 >(효종< 孝宗 >)의 스승을 지내고, 병자호란< 丙子胡亂 > 때 왕< 王 >을 남한산성< 南漢山城 >으로 호종< 扈從 >하였다가 낙향한 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후 효종< 孝宗 >이 즉위하여 선생을 부르니 성의를 다하여 섬겼다. 현종< 顯宗 > 9년(1668)에 우의정< 右議政 >을 거쳐 좌의정< 左議政 >을 역임하였으나 당쟁< 黨爭 >으로 많은 파란을 겪었고 유배< 流配 >되기도 하였으며, 끝내는 왕세자< 王世子 > 책봉< 冊封 > 문제로 숙종< 肅宗 > 때 사약< 賜藥 >을 받았다. 5년 후 관작< 官爵 >이 복구되고 시호< 諡號 >가 내려졌다.
대로사비< 大老祠碑 >는 조선< 朝鮮 > 중기< 中期 >의 거유< 巨儒 >인 송시열< 宋時烈 >(1607∼1689) 선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정조< 正祖 > 11년(1787)에 세운 것이다. 선생의 자는 영보< 英甫 >, 호는 우암< 尤庵 >, 시호< 諡號 >는 문정< 文正 >이고 본관< 本貫 >은 은진< 恩津 >으로 송갑조< 宋甲祚 >의 3남이다. 인조< 仁祖 > 11년(1633)에 사마시< 司馬試 >에 합격하고 경릉참봉< 敬陵參奉 >이 되었다가 2년 후(1635)에는 봉림대군< 鳳林大君 >(효종< 孝宗 >)의 스승을 지내고, 병자호란< 丙子胡亂 > 때 왕< 王 >을 남한산성< 南漢山城 >으로 호종< 扈從 >하였다가 낙향한 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후 효종< 孝宗 >이 즉위하여 선생을 부르니 성의를 다하여 섬겼다. 현종< 顯宗 > 9년(1668)에 우의정< 右議政 >을 거쳐 좌의정< 左議政 >을 역임하였으나 당쟁< 黨爭 >으로 많은 파란을 겪었고 유배< 流配 >되기도 하였으며, 끝내는 왕세자< 王世子 > 책봉< 冊封 > 문제로 숙종< 肅宗 > 때 사약< 賜藥 >을 받았다. 5년 후 관작< 官爵 >이 복구되고 시호< 諡號 >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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