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서구 화정4동 염주주공아파트
시조창은 전통 성악곡의 한 갈래로 시절가<時節歌>, 시절단가<時節短歌>라고도 한다. 고려말부터 시작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최고<最高> 문헌은 석북 신광수(<石北 申光洙>:1712∼1775)의「석북집<石北集>」,「관서악부<關西樂府>」로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이 시조에 장단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최초의 악보는 서유구<徐有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유예지<遊藝志>」와 이규경<李圭景>의 「구라철사금자보<歐邏鐵絲琴子譜>」가 있다. 이를 보면 시조창은 조선시대 후기에 비로소 시작되었으며 현재의 평시조처럼 황종<黃鐘>, 중려<仲呂>, 임종<林鍾>의 3음계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상술은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에서 1927년 출생하였다. 19세(1945년)에 박희성에게 시조창을 처음 배웠으며 21세에는 나주시 문평면 출신의 박남규에게 시조창을 배웠다. 28세에는 광주국악원의 안치선에게 시조창과 단소<短簫>를 배웠으며 34세에는 유종구에게 시조를 배웠다. 37세에는 정경태(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에게 시조 음계와 시조창을 접목한 율여상조법<律呂相調法>과 정가<正歌>로 불리는 가곡<歌曲>, 가사<歌詞>, 시조<時調> 등을 배웠다. 이외에도 단소, 소리북 장단 등에 매우 능하며, 풍부한 성량을 지니고 있어 변화무쌍한 5박, 8박 장단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다. 또한 1963년 제1회 전국 시조·가곡·가사 경창대회 명창부 1등으로 그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1968년부터는 전국시조경창대회에서 여러 차례 심사위원도 역임하였다. 광주국악원(1963∼1973년)과 광주시립국악원(1973∼1981년)에서 시조와 단소를 가르쳤으며, 광주국악원장을 역임(1976∼1981년)하면서 후진 양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시조창은 전통 성악곡의 한 갈래로 시절가<時節歌>, 시절단가<時節短歌>라고도 한다. 고려말부터 시작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최고<最高> 문헌은 석북 신광수(<石北 申光洙>:1712∼1775)의「석북집<石北集>」,「관서악부<關西樂府>」로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이 시조에 장단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최초의 악보는 서유구<徐有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유예지<遊藝志>」와 이규경<李圭景>의 「구라철사금자보<歐邏鐵絲琴子譜>」가 있다. 이를 보면 시조창은 조선시대 후기에 비로소 시작되었으며 현재의 평시조처럼 황종<黃鐘>, 중려<仲呂>, 임종<林鍾>의 3음계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상술은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에서 1927년 출생하였다. 19세(1945년)에 박희성에게 시조창을 처음 배웠으며 21세에는 나주시 문평면 출신의 박남규에게 시조창을 배웠다. 28세에는 광주국악원의 안치선에게 시조창과 단소<短簫>를 배웠으며 34세에는 유종구에게 시조를 배웠다. 37세에는 정경태(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에게 시조 음계와 시조창을 접목한 율여상조법<律呂相調法>과 정가<正歌>로 불리는 가곡<歌曲>, 가사<歌詞>, 시조<時調> 등을 배웠다. 이외에도 단소, 소리북 장단 등에 매우 능하며, 풍부한 성량을 지니고 있어 변화무쌍한 5박, 8박 장단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다. 또한 1963년 제1회 전국 시조·가곡·가사 경창대회 명창부 1등으로 그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1968년부터는 전국시조경창대회에서 여러 차례 심사위원도 역임하였다. 광주국악원(1963∼1973년)과 광주시립국악원(1973∼1981년)에서 시조와 단소를 가르쳤으며, 광주국악원장을 역임(1976∼1981년)하면서 후진 양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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