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산26-1
행주대첩비(구비)< 幸州大捷碑(舊碑) >는 임진왜란< 壬辰倭亂 >이 끝난 후 조선< 朝鮮 > 선조< 宣祖 > 35년(1603)에 권율< 權慄 >(1537∼1599) 장군의 막하에 있던 여러 장수들이 장군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행주대첩은 선조 26년(1593) 2월 권율 장군이 서울 탈환을 위해 행주 덕양산에 진을 구축하자 일본군의 3만여 명이 포위 공격한 싸움으로 처절한 접전 끝에 물리친 임진< 壬辰 > 삼대첩< 三大捷 >의 하나다. 대리석< 大理石 >으로 된 이 비의 전면 비문은 선조 때의 유명한 문장가 최립< 崔笠 >이 찬< 撰 >하고 당대의 명필 한호< 韓濩 >가 썼으며 비 머리 전자< 篆字 >는 김상용< 金尙容 >의 글씨이다. 후면 비문은 장군의 서랑< 서郞 > 이항복< 李恒福 >의 글을 김현성< 金玄成 >이 음기< 陰記 >하였다. 비의 높이는 178cm, 폭 80cm, 두께 18cm이고, 비석 어깨부분에서 밑부분까지 약 3cm 넓이로 균열이 나 있으며 기단부< 基壇部 >는 묻혀 있다.
행주대첩비(구비)< 幸州大捷碑(舊碑) >는 임진왜란< 壬辰倭亂 >이 끝난 후 조선< 朝鮮 > 선조< 宣祖 > 35년(1603)에 권율< 權慄 >(1537∼1599) 장군의 막하에 있던 여러 장수들이 장군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행주대첩은 선조 26년(1593) 2월 권율 장군이 서울 탈환을 위해 행주 덕양산에 진을 구축하자 일본군의 3만여 명이 포위 공격한 싸움으로 처절한 접전 끝에 물리친 임진< 壬辰 > 삼대첩< 三大捷 >의 하나다. 대리석< 大理石 >으로 된 이 비의 전면 비문은 선조 때의 유명한 문장가 최립< 崔笠 >이 찬< 撰 >하고 당대의 명필 한호< 韓濩 >가 썼으며 비 머리 전자< 篆字 >는 김상용< 金尙容 >의 글씨이다. 후면 비문은 장군의 서랑< 서郞 > 이항복< 李恒福 >의 글을 김현성< 金玄成 >이 음기< 陰記 >하였다. 비의 높이는 178cm, 폭 80cm, 두께 18cm이고, 비석 어깨부분에서 밑부분까지 약 3cm 넓이로 균열이 나 있으며 기단부< 基壇部 >는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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