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성시 미양면 구수리 산87-1
이 비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 홍계남(1564~1579) 장군의 옛 싸움터에 세운 전적비<戰蹟碑>로, 장군의 고향 안성군민<安城郡民>이 그의 전공을 기리어 조선<朝鮮> 영조<英祖> 21년(1745)에 세운 것이다.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申砬> 장군의 휘하에서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 싸움에 참여했으며, 고향에 돌아와 의병장이 되어 목촌<木村>, 죽산<竹山>, 양지<陽智>, 용인<龍仁>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적의 기세를 크게 꺾었다. 이 공으로 수원판관<水原判官> 겸 기호양도<畿湖兩道>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그후 영천군수<永川郡守> 겸 경상도 조방장이 되어 함안<咸安>, 의령<宜寧>, 곡성<谷城>, 구례<求禮>, 고성<固城>, 영천<永川>, 경주<慶州>, 안강<安康>, 상주<尙州> 등지에서 격전했다. 죽은 후에는 장군의 드높은 충효대절<忠孝大節>을 기리고자 삼강행실<三綱行實>에 속기<續記>되었고 마을에는 정문<旌門>이 세워지는 한편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정1품 관직)에 증직되었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義兵將> 홍계남(1564~1579) 장군의 옛 싸움터에 세운 전적비<戰蹟碑>로, 장군의 고향 안성군민<安城郡民>이 그의 전공을 기리어 조선<朝鮮> 영조<英祖> 21년(1745)에 세운 것이다.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申砬> 장군의 휘하에서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 싸움에 참여했으며, 고향에 돌아와 의병장이 되어 목촌<木村>, 죽산<竹山>, 양지<陽智>, 용인<龍仁>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적의 기세를 크게 꺾었다. 이 공으로 수원판관<水原判官> 겸 기호양도<畿湖兩道>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그후 영천군수<永川郡守> 겸 경상도 조방장이 되어 함안<咸安>, 의령<宜寧>, 곡성<谷城>, 구례<求禮>, 고성<固城>, 영천<永川>, 경주<慶州>, 안강<安康>, 상주<尙州> 등지에서 격전했다. 죽은 후에는 장군의 드높은 충효대절<忠孝大節>을 기리고자 삼강행실<三綱行實>에 속기<續記>되었고 마을에는 정문<旌門>이 세워지는 한편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정1품 관직)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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