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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회현리 패총 - 국제적인 교역의 중요한 길목이었음을 보여주는 패총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남 김해시 봉황동 253번지

이 유적은 낙동강 하류의 층적평야를 한눈에 바로볼 수 있는 높이 7m, 동서 길시 약 130m, 남북 너비 약 30m의 낮은 구릉 위에 형성된 패총으로 남부지방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 유적의 하나이다. 구릉의 남쪽과 동북쪽에 패각층의 단면이 노출된 것을 볼 수 있다.
1907년에 발견되어 1920년 1차 발굴되었고 이 당시의 행정구역에 따라 회현리 패총으로 명명되었으며, 1934년에 다시 조사되었고 1992년에는 회현리 패총이 있는 봉황대 주변에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1920년의 발굴에서는 王莽의 貨泉과 탄화미(炭化米), 타날격자문토기(打捺格子文土器), 승석문토기(繩蓆文土器)가 발견되었고 1934년의 조사에는 지석묘(支石墓), 석관묘(石棺墓), 옹관묘(甕棺墓) 등이 발견되어 패총이 형성되기 이전의 저석묘 및 석관묘 유구와 그 이후의 초기 철기시대 패총이 중첩된 것으로 밝혀졌다.
일제때에 이루어진 이 패총의 발굴과 해석방법 및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판적인 견해가 제시되어 있으나 이 유적에서 발굴된 打捺格子文土器와 繩蓆文土器를 표준으로 김해식토기라 명명되었으며, 김해식토기는 초기 철기시대 및 원삼국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로 제시되었는데, 김해식토기는 종래의 무문토기(無文土器)들 보다 소성온도가 높은 경질(硬質)의 토기들로서 그릇의 표면에 격자문이나 승석문 등의 타날문이 남아 있는 것을 가장 뚜렷한 특색으로 삼을 수 있다. 타날문은 토기를 성형할 때 기벽(器壁)을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문양이 새겨진 방망이로 두드린데서 생긴 것이며, 김해토기는 뒤에 신라토기의 모체가 되었기 때문에 원시 신라토기라 부르기도 한다. 1920년에 있었던 조사에서 발견된 왕망의 貨泉은 중국의 전한과 후한 사이에 있었던 新代에 사용되었던 화폐로 이 유적의 연대를 기원 전후한 시기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하는 자료인데 최근에 와질토기시대(瓦質土器時代)의 설정을 주장하는 논의와 함께 이 유적의 상한연대를 AD 3세기 이후로 보는 견해도 등장하였다. 그리고 이때 발견된 탄화미는 고대미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서 우리나라 도작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934년에 실시된 조사에서는 대지 위에 D區에서 발굴된 석관묘에서 석촉(石鏃)과 홍도(紅陶)가, 옹관묘에서는 碧玉製의 管玉과 사형동검(細形銅劍) 등이 출토되었다. 이 때에 발견된 옹관은 김해식 옹관으로 불리는데 이러한 형태의 옹관은 우리나라의 다른 곳에서는 아직까지 발견된 예가 없으나, 일본에서는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 회현리 패총에서 발견된 왕망의 貨泉과 김해식 옹관은 이 지역이 초기 철기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이어지는 국제적인 교역의 중요한 길목이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1992년에서 1993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봉황대 일원에 대한 조사에서는 패총과 주거지, 환호, 주혈, 폐기장, 유물포함층 등이 확인되었는데 동쪽 사면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확인된 패총은 3∼6세기에 걸쳐 형성된 것이며 군집을 이루는 주거지는 3∼6세기대의 장기간에 걸쳐 축조된 것이다. 폭 350cm, 깊이 150cm 규모로 설치된 환호는 기원 전 1세기의 것과 4세기대의 것으로 보고되었다. 출토유물은 적갈색연토질토기가 주류를 이루나 와질토기와 도질토기도 출토되며 숫돌, 골각기, 철기, 목제빗, 동물뼈, 철재(鐵滓), 送風管 등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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