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김해시 흥동 424번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국민에게 내린 한글로 된 교서(敎書)이다. 선조 26년(1593) 9월에 선조가 의주(義州)에 파천하여 그곳 행재소(行在所)에서 백성에게 내린 것이다. 당시 의병의 봉기와 明軍의 지원으로 평양, 한양 등의 실지를 회복하게 되었고 왜군은 남쪽으로 밀리면서 부산, 동래, 등지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우리 국민들이 포로가 되어 왜적에게 협조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에 선조는 일반 대중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한글로 교서를 내려 왜군의 포로가 되어 있는 국민을 회유하여 돌아 오도록 한 것이다.
당시 김해의 수성장 권탁(守城將 權卓)이 이를 가지고 적진에 잠입하여 왜군 수십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우리 동포 100여 명을 구출하여 나왔다. 이 문서는 권탁의 후손 집에 보관되어 오다가 철종 5년(1854) 김해시 흥동에 어서각(御書閣)이 건립되면서 줄곧 이곳에 보관되어 왔다. 이 교서는 양질의 닥종이에 한글로 총 12항에 걸쳐 墨書되었으며 諭書之寶(유서지보)란 어보(御寶)가 세 곳에 찍혀 있다. 이 문서는 임진왜란 당시 상황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모든 공적 문서를 漢文으로 기록하던 통례와는 달리 일반 대중, 특히 포로된 우리 백성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한글로 쓰여진 점에서 국어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국민에게 내린 한글로 된 교서(敎書)이다. 선조 26년(1593) 9월에 선조가 의주(義州)에 파천하여 그곳 행재소(行在所)에서 백성에게 내린 것이다. 당시 의병의 봉기와 明軍의 지원으로 평양, 한양 등의 실지를 회복하게 되었고 왜군은 남쪽으로 밀리면서 부산, 동래, 등지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우리 국민들이 포로가 되어 왜적에게 협조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에 선조는 일반 대중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한글로 교서를 내려 왜군의 포로가 되어 있는 국민을 회유하여 돌아 오도록 한 것이다.
당시 김해의 수성장 권탁(守城將 權卓)이 이를 가지고 적진에 잠입하여 왜군 수십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우리 동포 100여 명을 구출하여 나왔다. 이 문서는 권탁의 후손 집에 보관되어 오다가 철종 5년(1854) 김해시 흥동에 어서각(御書閣)이 건립되면서 줄곧 이곳에 보관되어 왔다. 이 교서는 양질의 닥종이에 한글로 총 12항에 걸쳐 墨書되었으며 諭書之寶(유서지보)란 어보(御寶)가 세 곳에 찍혀 있다. 이 문서는 임진왜란 당시 상황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모든 공적 문서를 漢文으로 기록하던 통례와는 달리 일반 대중, 특히 포로된 우리 백성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한글로 쓰여진 점에서 국어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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