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679
만안교 < 萬安橋 >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朝鮮 > 정조< 正祖 >(1776∼1800, 재위)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 生父 > 사도세자< 思悼世子 >의 능을 참배하러 갈 때, 참배 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축조한 조선후기< 朝鮮後期 >의 대표적인 홍예석교< 虹예石橋 >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 楊州 >에서 화산< 華山 >으로 이장한 후, 자주 능을 참배하며 부친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한다. 당초의 참배 행렬은 궁궐을 떠나 노량진< 鷺梁津 >, 과천< 果川 >, 수원< 水原 >을 거치는 것이 빠른 길이었으나, 그 노변에 대왕과 원한이 있는 김상로< 金尙魯 >의 묘가 있으므로 불길하다 하여 시흥< 始興 >, 수원쪽으로 행로를 바꾸면서 이 다리를 축조한 것이다. 축조공사에는 경기관찰사< 京畿觀察使 >, 병마수군절도사< 兵馬水軍節度使 >, 수원< 水原 >, 개성< 開城 >, 강화< 江華 > 留守까지 동원되어 7개의 홍예수문과 그 위에 화강암판석< 花崗岩板石 >과 장대석< 長臺石 >을 깔아 축조한 것이다. 원래는 현 위치로부터 남쪽 200m 지점에 있었으나 국도< 國道 > 확장으로 1980년 8월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만안교 < 萬安橋 >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朝鮮 > 정조< 正祖 >(1776∼1800, 재위)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 生父 > 사도세자< 思悼世子 >의 능을 참배하러 갈 때, 참배 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축조한 조선후기< 朝鮮後期 >의 대표적인 홍예석교< 虹예石橋 >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 楊州 >에서 화산< 華山 >으로 이장한 후, 자주 능을 참배하며 부친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한다. 당초의 참배 행렬은 궁궐을 떠나 노량진< 鷺梁津 >, 과천< 果川 >, 수원< 水原 >을 거치는 것이 빠른 길이었으나, 그 노변에 대왕과 원한이 있는 김상로< 金尙魯 >의 묘가 있으므로 불길하다 하여 시흥< 始興 >, 수원쪽으로 행로를 바꾸면서 이 다리를 축조한 것이다. 축조공사에는 경기관찰사< 京畿觀察使 >, 병마수군절도사< 兵馬水軍節度使 >, 수원< 水原 >, 개성< 開城 >, 강화< 江華 > 留守까지 동원되어 7개의 홍예수문과 그 위에 화강암판석< 花崗岩板石 >과 장대석< 長臺石 >을 깔아 축조한 것이다. 원래는 현 위치로부터 남쪽 200m 지점에 있었으나 국도< 國道 > 확장으로 1980년 8월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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