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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완구 - 조선시대 총기류의 발전을 볼 수 있는 중완구

by 넥스루비 2007. 8. 7.
명 문 : 萬曆十八年九月 日營 鑄成 震天雷萬里 重八十五斤 高州浦匠李勿金
이 중완구는 1985년 12월 15일 경주 하동군 옥종면 동화리 산 57번지에서 진양군 수곡면 원계리 318번지에 거주하는 김해성씨가 등산길에서 발견 신고한 매장 문화재이다. 원래 이 완구는 일명 댕구라고도 하지만 최초에는 화통완구 또는 총통완구라고도 한 有筒式(砲口에서 화약과 發射物을 裝裝함) 화기의 일종이다. 이는 이미 조선초 태종 때 崔海山(1380∼1443)이 제작하여 試放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가 있고 그 후 세종 卽位년(1418) 8월에는 대마도 경차관(敬差官) 이예(李藝)가 들어오면서 그 곳에서 水鐵製 화통완구를 가져다 재래의 銅製완구를 개량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때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同王 4년(1442) 8월에 이르러 전국 해안에 연대(烟臺)를 증축하고 수철제를 완구를 보급하는 조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 후 同王 9년(1437) 7월에는 평안도 절제사 이천(李  1376∼1456)이 품신하기를 "대완구는 너무 무거워 싣고 부리기가 어려워 쓸모가 없고 오직 중완구는 공격하는데 편리하지만 소에는 실을 수가 있어도 말에는 실을 수 없으며 소완구는 너무 적어 쓸모가 없으니 중완구와 소완구의 중간정도로 만들기를 원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도 전략개념에 부응코자 한 흔적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완구는 공수성용 화기용로서 최초에는 주로 수마단석(水磨團石)을 발사물로 사용하였지만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서는 화포장 이장손(李長孫)이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창제함으로써 단석과 더불어 사용하게 되었고 한편 그의 이동에 있어서도 이제까지는 소나 말에만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거포에 있어서도 별도의 포가(砲架)나 포대(砲臺)를 설치하는 도리밖에 없었으나 高宗초에 이르러 훈련대장 신헌(申  1810∼1888) 장군이 사륜마반차(四輪磨盤車)를 창제한 후로는 포구운용에 획기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이 중완구는 명문으로 보아 선종 23년(1590) 9월에 함경도 고주포영에서 화포장 李勿金에 의해 주조되었고 또한 여기에 비격진천뢰를 발사하면 그 사정(射程)은 1리에 미친다고 하였다. 특히 그 제법에 있어 구연(口緣)은 대선(帶線)과 더불어 마무리하고 이어 그 구연에서 격목통부위(檄木筒部位)에 이르기까지는 유연한 곡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어 이동이나 거포에 편리함을 도모하기 위해 설치한 손잡이인 거금(擧金)은 正中界線을 따라 前後帶線을 사이하여 설치하고 약실은 격목동부위에 이어 거금 뒤쪽부터 약간 도톰한데 약실 뒤쪽에는 중앙계선 좌우로 선혈(線穴)을 뚫었다. 더욱 이 완구의 발견지가 경남 하동지성(河東地城)이고 보면 전술한 바와 같이 선종 23년 9월에 함경도 고주포영에서 주조한 후 필공(畢貢)은 임란때 패주하는 왜구를 아군이 추격할 때 갖추었던 중장비였음을 실증케 하여 주고 있다.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1986년 4월 하동 고현성지(高縣城址)인 고전면 고하리 547번지에서 비격진천뢰가 출토되어 당시 아군장비의 실상을 입증하여 주기도 한다. 또한 이 완구는 주조시기나 그 상태가 정확하고 완전할 뿐만 아니라 임란에 직접 참전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함은 물론 우리나라 화기발달연구사로 그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국방과학기술문화재로 길이 보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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