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광주군 중부면 815-2
이회< 李晦 >와 그의 처첩< 妻妾 >을 모신 사당< 祠堂 >으로 이회< 李晦 >는 조선< 朝鮮 > 인조< 仁祖 > 2년(1624) 남한산성< 南漢山城 > 축성< 築城 > 때에 동남쪽의 축성공사를 맡아 하였으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마치지 못하였다는 무고한 모략을 받고 무참히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 三南地方 >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다. 그후 그가 이룬 공사를 재조사해보니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그의 죄가 없음이 밝혀져 서장대< 西將臺 > 옆에 사당< 祠堂 >을 지어 그의 넋을 달래게 하였다. 본당< 本堂 >의 전면에는 이회< 李晦 >의 초상화< 肖像畵 >가 있고 좌, 우편에는 벽암대사< 碧岩大師 >와 이회< 李晦 > 처첩< 妻妾 >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원래 것은 6·25사변 때 분실되고 지금 있는 것은 그후 새로 만든 것이다.
이회< 李晦 >와 그의 처첩< 妻妾 >을 모신 사당< 祠堂 >으로 이회< 李晦 >는 조선< 朝鮮 > 인조< 仁祖 > 2년(1624) 남한산성< 南漢山城 > 축성< 築城 > 때에 동남쪽의 축성공사를 맡아 하였으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마치지 못하였다는 무고한 모략을 받고 무참히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 三南地方 >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다. 그후 그가 이룬 공사를 재조사해보니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그의 죄가 없음이 밝혀져 서장대< 西將臺 > 옆에 사당< 祠堂 >을 지어 그의 넋을 달래게 하였다. 본당< 本堂 >의 전면에는 이회< 李晦 >의 초상화< 肖像畵 >가 있고 좌, 우편에는 벽암대사< 碧岩大師 >와 이회< 李晦 > 처첩< 妻妾 >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원래 것은 6·25사변 때 분실되고 지금 있는 것은 그후 새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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