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광주군 중부면 815-1
이 건물은 조선< 朝鮮 > 인조< 仁祖 > 2년(1624)에 남한산성< 南漢山城 > 축성< 築城 >과 함께 축조된 동, 서, 남, 북의 4장대< 四將臺 >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로 산성내 최고봉인 일장산성< 日長山頂 >(해발 453m)에 위치하고 있어 성내와 인근의 양주< 楊州 >, 양평< 楊平 >, 용인< 龍仁 >, 고양< 高陽 > 및 서울, 인천< 仁川 >까지도 조망< 眺望 >할 수 있는 곳이다. 당초에는 단층누각< 單層樓閣 >으로 축조하고 서장대< 西將臺 >라 불리었으며 남한산성의 수어< 守禦 >를 맡았던 수어청< 守禦廳 >(전< 前 >, 좌< 左 >, 우< 右 >, 중< 中 >, 후< 後 >의 5관< 官 >이 소속되었음) 중 우영장< 右營將 >이 진< 陳 >을 치고 있었던 곳이다. 인조< 仁祖 > 14년(1636) 병자호란< 丙子胡亂 > 때에는 인조< 仁祖 >가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며 청태종< 淸太宗 >의 13만 대군과 대항하여 45일간을 항전하던 곳으로 영조< 英祖 > 27년(1751)에는 유수< 留守 > 이기진< 李箕鎭 >이 왕명< 王命 >으로 서장대< 西將臺 > 위에 2층 누각을 건립하고 외부 편액< 扁額 >은 수어장대, 내부편액은 무망루< 無忘樓 >라 이름하였다. 무망루라 함은 병자호란< 丙子胡亂 > 때 인조< 仁祖 >가 겪은 시련과 인조< 仁祖 >의 아들인 효종< 孝宗 >이 볼모로 심양< 瀋陽 >(현 봉천< 奉天 >)에 잡혀 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여 항상 청국< 淸國 >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 北伐 >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후 영조< 英祖 >, 정조< 正祖 >가 효종< 孝宗 >의 능소< 陵所 >인 여주< 驪州 > 영릉< 寧陵 >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 장대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 때의 치욕사< 恥辱史 >를 되새겼다고 전한다. 현 건물은 고종< 高宗 > 건양< 建陽 > 원년(1896) 유수< 留守 > 박기수< 朴岐壽 >가 개건< 改建 >하였는데 2익공계< 二翼工系 > 양식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하층 평면은 정면 3칸과 측면 2칸을 구획하여 고주< 高柱 >를 세우고 주위 4면에 퇴칸을 돌렸으며 중앙에는 단< 壇 >을 만들었다. 상층은 하층에 세운 고주가 그대로 연장되어 4면의 변주< 邊柱 >가 되어 평면 비례상 급격히 줄어든 감이 있다.
이 건물은 조선< 朝鮮 > 인조< 仁祖 > 2년(1624)에 남한산성< 南漢山城 > 축성< 築城 >과 함께 축조된 동, 서, 남, 북의 4장대< 四將臺 >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로 산성내 최고봉인 일장산성< 日長山頂 >(해발 453m)에 위치하고 있어 성내와 인근의 양주< 楊州 >, 양평< 楊平 >, 용인< 龍仁 >, 고양< 高陽 > 및 서울, 인천< 仁川 >까지도 조망< 眺望 >할 수 있는 곳이다. 당초에는 단층누각< 單層樓閣 >으로 축조하고 서장대< 西將臺 >라 불리었으며 남한산성의 수어< 守禦 >를 맡았던 수어청< 守禦廳 >(전< 前 >, 좌< 左 >, 우< 右 >, 중< 中 >, 후< 後 >의 5관< 官 >이 소속되었음) 중 우영장< 右營將 >이 진< 陳 >을 치고 있었던 곳이다. 인조< 仁祖 > 14년(1636) 병자호란< 丙子胡亂 > 때에는 인조< 仁祖 >가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며 청태종< 淸太宗 >의 13만 대군과 대항하여 45일간을 항전하던 곳으로 영조< 英祖 > 27년(1751)에는 유수< 留守 > 이기진< 李箕鎭 >이 왕명< 王命 >으로 서장대< 西將臺 > 위에 2층 누각을 건립하고 외부 편액< 扁額 >은 수어장대, 내부편액은 무망루< 無忘樓 >라 이름하였다. 무망루라 함은 병자호란< 丙子胡亂 > 때 인조< 仁祖 >가 겪은 시련과 인조< 仁祖 >의 아들인 효종< 孝宗 >이 볼모로 심양< 瀋陽 >(현 봉천< 奉天 >)에 잡혀 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여 항상 청국< 淸國 >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 北伐 >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후 영조< 英祖 >, 정조< 正祖 >가 효종< 孝宗 >의 능소< 陵所 >인 여주< 驪州 > 영릉< 寧陵 >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 장대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 때의 치욕사< 恥辱史 >를 되새겼다고 전한다. 현 건물은 고종< 高宗 > 건양< 建陽 > 원년(1896) 유수< 留守 > 박기수< 朴岐壽 >가 개건< 改建 >하였는데 2익공계< 二翼工系 > 양식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하층 평면은 정면 3칸과 측면 2칸을 구획하여 고주< 高柱 >를 세우고 주위 4면에 퇴칸을 돌렸으며 중앙에는 단< 壇 >을 만들었다. 상층은 하층에 세운 고주가 그대로 연장되어 4면의 변주< 邊柱 >가 되어 평면 비례상 급격히 줄어든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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