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조양동 666
754년 (경덕왕13년)에 세워진 성덕왕릉비를 떠받치고 있었을 귀부가 능전방 100m 지점에 남아 있다. 비신과 이수는 없어졌으며 귀부는 목이 결실된 채 파괴가 심한 편이다. 그러나 귀부는 웅대하며 방형대좌위에 놓여 있는데 앞발이 5개, 뒤발이 4개의 발톱으로 조각되었으며 등위에 덮힌 귀갑은 6각의 문양을 하고 있다.
개개의 귀갑문 안에는 역시 평륜을 나타내는 듯한 갑층을 4단으로 표시하였는데 귀갑의 표현들이 태종무열왕릉의 귀부나 전 김인문묘 귀부보다 사실적인 표현이 약하고 전체적인 면에서는 강인하고 의기가 넘치는 생동감 역시 결여되어 있다. 특히 등위에 얹혀 있는 귀갑의 외연 전체에는 구름문이나 당초문을 조각한 것이 아니라 4조의 새끼를 중첩해서 마디마디를 묶은 모양을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귀부 후면 일부에는 생동감이 없는 도식화된 일종의 당초문을 조각한 것은 전면과 다르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귀두 가까이에서는 태종무열왕릉 귀부와 김인문묘 귀부와는 달리 귀갑이 어깨 넘어까지 덮고 내려와서 앞발 부분으로 이어져 있는 형상으로 되어가는 것이 특이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귀부의 조성연대는 성덕왕릉을 조영한 이후 18년이 지난 뒤에 건립된 것으로 왕릉의 석물 등에서 나타나는 조각수법과는 상당한 거리를 느끼게 하며 퇴락한 수법으로 되어있다. 방향은 다른 귀부와 같이 서남향을 하고 있다.
능비 주위의 조사에서는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비편<碑片>이 수습되었는데 최초는 1935년 11월 최남주씨에 의해서였다. 당시 최씨는 귀부 주변에서 작은 비편 두 개를 발견했으나 모두 판독이 불가능하였으며 그 후 1966년 1월 경주 박물관의 발일훈씨에 의해 귀부 주변정리중 6개의 비편이 발견되었지만 두편만이 각 1자씩 판독되었다. 같은 날 비편 이외에도 연화문 와당과 이수의 소편이 출토되었다. 최근 1976년 또다시 귀부 주면에서 비편이 수습되었는데 1자만 판독되었다.
754년 (경덕왕13년)에 세워진 성덕왕릉비를 떠받치고 있었을 귀부가 능전방 100m 지점에 남아 있다. 비신과 이수는 없어졌으며 귀부는 목이 결실된 채 파괴가 심한 편이다. 그러나 귀부는 웅대하며 방형대좌위에 놓여 있는데 앞발이 5개, 뒤발이 4개의 발톱으로 조각되었으며 등위에 덮힌 귀갑은 6각의 문양을 하고 있다.
개개의 귀갑문 안에는 역시 평륜을 나타내는 듯한 갑층을 4단으로 표시하였는데 귀갑의 표현들이 태종무열왕릉의 귀부나 전 김인문묘 귀부보다 사실적인 표현이 약하고 전체적인 면에서는 강인하고 의기가 넘치는 생동감 역시 결여되어 있다. 특히 등위에 얹혀 있는 귀갑의 외연 전체에는 구름문이나 당초문을 조각한 것이 아니라 4조의 새끼를 중첩해서 마디마디를 묶은 모양을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귀부 후면 일부에는 생동감이 없는 도식화된 일종의 당초문을 조각한 것은 전면과 다르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귀두 가까이에서는 태종무열왕릉 귀부와 김인문묘 귀부와는 달리 귀갑이 어깨 넘어까지 덮고 내려와서 앞발 부분으로 이어져 있는 형상으로 되어가는 것이 특이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귀부의 조성연대는 성덕왕릉을 조영한 이후 18년이 지난 뒤에 건립된 것으로 왕릉의 석물 등에서 나타나는 조각수법과는 상당한 거리를 느끼게 하며 퇴락한 수법으로 되어있다. 방향은 다른 귀부와 같이 서남향을 하고 있다.
능비 주위의 조사에서는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비편<碑片>이 수습되었는데 최초는 1935년 11월 최남주씨에 의해서였다. 당시 최씨는 귀부 주변에서 작은 비편 두 개를 발견했으나 모두 판독이 불가능하였으며 그 후 1966년 1월 경주 박물관의 발일훈씨에 의해 귀부 주변정리중 6개의 비편이 발견되었지만 두편만이 각 1자씩 판독되었다. 같은 날 비편 이외에도 연화문 와당과 이수의 소편이 출토되었다. 최근 1976년 또다시 귀부 주면에서 비편이 수습되었는데 1자만 판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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