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북부동 1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로 추정한다. 사적 제96호.
동쪽에 향일문, 서쪽에 망미문, 남쪽에 징례문, 북쪽에 공신문 등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도시계획으로 경주 시가지가 확장되어 주변이 대부분 헐렸다. 다만 황성공원으로 가는 큰 길의 민가 뒤에 동벽이 조금 남아 옛 모습을 짐작케 한다. 40~50m가 고작이라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가로 40∼50Cm, 세로 20∼30Cm의 잘 다듬은 돌로 쌓여졌다. 그 성벽에서 간혹 탑재가 발견되는데 이는 개축할 때 부근 절에서 옮겨 온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 성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동경통지'에 따르면 성 높이는 12자 7치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주위가 4,075자, 높이 12자이며 성내에 우물이 80개소나 있다'고 되어 있다. 남쪽 징례문에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이 매달려 매일 울렸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조선은 이 성을 탈환하기 위해 이장손이 발명한 포인 비격진천뢰를 사용해 성을 되찾았다. 이 성은 임란 중 대부분 무너져 영조 때 개축되었다고 전한다.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로 추정한다. 사적 제96호.
동쪽에 향일문, 서쪽에 망미문, 남쪽에 징례문, 북쪽에 공신문 등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도시계획으로 경주 시가지가 확장되어 주변이 대부분 헐렸다. 다만 황성공원으로 가는 큰 길의 민가 뒤에 동벽이 조금 남아 옛 모습을 짐작케 한다. 40~50m가 고작이라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가로 40∼50Cm, 세로 20∼30Cm의 잘 다듬은 돌로 쌓여졌다. 그 성벽에서 간혹 탑재가 발견되는데 이는 개축할 때 부근 절에서 옮겨 온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 성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동경통지'에 따르면 성 높이는 12자 7치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주위가 4,075자, 높이 12자이며 성내에 우물이 80개소나 있다'고 되어 있다. 남쪽 징례문에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이 매달려 매일 울렸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조선은 이 성을 탈환하기 위해 이장손이 발명한 포인 비격진천뢰를 사용해 성을 되찾았다. 이 성은 임란 중 대부분 무너져 영조 때 개축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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