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성동동 4
경주시내 성동동에 위치한 이 건물지는 1937년 일제시대에 발굴되면서 그 유적의 존재가 알려져 전랑지(殿廊址)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생기게 되면서 주목받게 된 유적이다.
그 이전에는 지표에 초석(礎石)과 기와편들이 많이 흩어져 있어서 신라시대의 사지(寺址)로 알려져 왔으나 발굴결과 전당지(殿堂址) 6개소, 장랑지(長廊址) 6개소, 문지(門址) 2개소, 당장지 3개소, 우물 1개소 등이 드러났다.
가람배치와는 전혀 다른 유구여서 누가 보더라도 신라시대의 궁궐 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원래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당시의 조사가 초석과 장대석(長臺石)이 있는 부분을 시굴(試掘)하는 조사였기 때문에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었으나 대규모의 궁궐이 있었음을 확인하는 성과는 얻었던 것이다.
일제시대에 발굴하여 전랑지라 이름한 경주시 성동동 17-4번지를 비롯한 69필지의 26.912㎡(8,140평)에 대하여는 사적 제88호로 지정하여 두었다.
발굴한 각 유구층(遺구層)에서는 고신라에서 통일신라에 이르는 각종 와전류(瓦塼類)와 토기류(土器類) 등이 출토되어 유적의 시대적인 배경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이들 유구의 하층(下層)에서는 선대 건물(先代建物)의 기단토(基壇土)로 판단되는 유구층이 거의 전체적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내부에서는 고신라 시대의 와당(瓦當)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경주시내 성동동에 위치한 이 건물지는 1937년 일제시대에 발굴되면서 그 유적의 존재가 알려져 전랑지(殿廊址)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생기게 되면서 주목받게 된 유적이다.
그 이전에는 지표에 초석(礎石)과 기와편들이 많이 흩어져 있어서 신라시대의 사지(寺址)로 알려져 왔으나 발굴결과 전당지(殿堂址) 6개소, 장랑지(長廊址) 6개소, 문지(門址) 2개소, 당장지 3개소, 우물 1개소 등이 드러났다.
가람배치와는 전혀 다른 유구여서 누가 보더라도 신라시대의 궁궐 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원래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당시의 조사가 초석과 장대석(長臺石)이 있는 부분을 시굴(試掘)하는 조사였기 때문에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었으나 대규모의 궁궐이 있었음을 확인하는 성과는 얻었던 것이다.
일제시대에 발굴하여 전랑지라 이름한 경주시 성동동 17-4번지를 비롯한 69필지의 26.912㎡(8,140평)에 대하여는 사적 제88호로 지정하여 두었다.
발굴한 각 유구층(遺구層)에서는 고신라에서 통일신라에 이르는 각종 와전류(瓦塼類)와 토기류(土器類) 등이 출토되어 유적의 시대적인 배경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이들 유구의 하층(下層)에서는 선대 건물(先代建物)의 기단토(基壇土)로 판단되는 유구층이 거의 전체적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내부에서는 고신라 시대의 와당(瓦當)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