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135
마을에 들어서면서 곧 오른편 남산< 南山 > 오르막 대지< 臺地 >에 세워진 정자< 亭子 >이다. 양동< 良洞 >마을의 내< 內 > ·외< 外 >에는 여러 정자< 亭子 >가 있어 손< 孫 > ·이< 李 > 양씨< 兩氏 >들은 각파종중< 各派宗中 >마다 정자< 亭子 >가 있다고 한다. 심수정< 心水亭 >은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인데 향단파< 香壇派 >의 소유< 所有 >이다. 정자< 亭子 >는 ㄱ자형< 字形 > 평면< 平面 >을 이루었으며 ㄱ자< 字 >로 꺾인 모서리가 북촌< 北村 >을 향< 向 >했으므로 대각남향< 對角南向 >집이 되는 셈이다. 정자< 亭子 >의 중심부< 中心部 >에 자리한 대청< 大廳 >은 7간< 間 >이고 서단< 西端 >의 누< 樓 >마루는 대< 大 >1간< 間 >에 삼면< 三面 >의 난간마루를 돌렸고 그 둘레에 계자각< 鷄子脚 > 난간을 부설하였다. 온돌방은 동단< 東端 >에 2간< 間 >, 서정< 西亭 > 중간< 中間 >에 1간< 間 >으로 모두 3간< 間 >을 두어 큰 정자< 亭子 >로서 필요한 간수< 間數 >와 기능안배< 機能按配 >를 고루 배려한 것을 알 수 있다. 정자< 亭子 >마루에서는 도랑 건너편 북촌< 北村 > 일대< 一帶 >를 조망< 眺望 >할 수 있으며 누하< 樓下 > 언덕배기에는 수백년< 數百年 > 수령< 樹齡 >의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울창하여 아랫마을에서 올려다보는 하절경관< 夏節景觀 >은 웅장한 맛이 있다. 정자< 亭子 > 뒤에도 역시 약간의 노목< 老木 >이 우거진 경사진 후원< 後園 >이고 전면< 前面 >에 행랑채가 둘러서 있어 이 정자< 亭子 >가 큰 산< 山 >을 앞에 두고 남향< 南向 >하는데 시각적 무리는 완화하는 셈이다. 모든 기둥은 두리기둥이며 대청< 大廳 >의 대들보는 고주< 高柱 >없이 전후평주< 前後平柱 >에 그대로 걸었다. 홑처마에 맞배지붕이고 첨하에 “심수정< 心水亭 > ” 편액< 扁額 >을 걸었다. 따로 담장을 둘렀고, 행랑채는 담장 밖에서 정자< 亭子 >을 향< 向 >해 세워졌다. 행랑채는 방, 마루, 방, 부엌, 광의 순< 順 >으로 1간< 間 >씩 구성된 ㄱ자< 字 >집인데, 부엌은 대략 간반< 間半 >에 이르고 광은 5척< 尺 >남짓한 좁은 1간< 間 >이다. 이 정자를 지키는 행랑집으로 지어진 고격< 古格 >있는 소가< 小家 >로서 굵은 각주< 角柱 >와 마루귀틀, 청판 등 건실하게 구성된 집이다. 이러한 방, 마루, 방, 부엌으로 연속되는 일자형< 一字形 > 구성은 남부지방< 南部地方 > 민가< 民家 >의 한 기본형< 基本形 >으로 가장 흔한 유형이지만 이집은 부엌을 전면< 前面 >으로 연장< 延長 >하였기 때문에 ㄱ자형< 字形 >이 된 것이다. 심수정< 心水亭 >은 1506년경< 年頃 >에 초건< 初建 >된 것이었다고 하나 철종< 哲宗 > 때에 한번 소실된 일이 있었고 지금의 집은 1917년< 年 > 중건< 重建 >한 것이라 전< 傳 >한다.
마을에 들어서면서 곧 오른편 남산< 南山 > 오르막 대지< 臺地 >에 세워진 정자< 亭子 >이다. 양동< 良洞 >마을의 내< 內 > ·외< 外 >에는 여러 정자< 亭子 >가 있어 손< 孫 > ·이< 李 > 양씨< 兩氏 >들은 각파종중< 各派宗中 >마다 정자< 亭子 >가 있다고 한다. 심수정< 心水亭 >은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인데 향단파< 香壇派 >의 소유< 所有 >이다. 정자< 亭子 >는 ㄱ자형< 字形 > 평면< 平面 >을 이루었으며 ㄱ자< 字 >로 꺾인 모서리가 북촌< 北村 >을 향< 向 >했으므로 대각남향< 對角南向 >집이 되는 셈이다. 정자< 亭子 >의 중심부< 中心部 >에 자리한 대청< 大廳 >은 7간< 間 >이고 서단< 西端 >의 누< 樓 >마루는 대< 大 >1간< 間 >에 삼면< 三面 >의 난간마루를 돌렸고 그 둘레에 계자각< 鷄子脚 > 난간을 부설하였다. 온돌방은 동단< 東端 >에 2간< 間 >, 서정< 西亭 > 중간< 中間 >에 1간< 間 >으로 모두 3간< 間 >을 두어 큰 정자< 亭子 >로서 필요한 간수< 間數 >와 기능안배< 機能按配 >를 고루 배려한 것을 알 수 있다. 정자< 亭子 >마루에서는 도랑 건너편 북촌< 北村 > 일대< 一帶 >를 조망< 眺望 >할 수 있으며 누하< 樓下 > 언덕배기에는 수백년< 數百年 > 수령< 樹齡 >의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울창하여 아랫마을에서 올려다보는 하절경관< 夏節景觀 >은 웅장한 맛이 있다. 정자< 亭子 > 뒤에도 역시 약간의 노목< 老木 >이 우거진 경사진 후원< 後園 >이고 전면< 前面 >에 행랑채가 둘러서 있어 이 정자< 亭子 >가 큰 산< 山 >을 앞에 두고 남향< 南向 >하는데 시각적 무리는 완화하는 셈이다. 모든 기둥은 두리기둥이며 대청< 大廳 >의 대들보는 고주< 高柱 >없이 전후평주< 前後平柱 >에 그대로 걸었다. 홑처마에 맞배지붕이고 첨하에 “심수정< 心水亭 > ” 편액< 扁額 >을 걸었다. 따로 담장을 둘렀고, 행랑채는 담장 밖에서 정자< 亭子 >을 향< 向 >해 세워졌다. 행랑채는 방, 마루, 방, 부엌, 광의 순< 順 >으로 1간< 間 >씩 구성된 ㄱ자< 字 >집인데, 부엌은 대략 간반< 間半 >에 이르고 광은 5척< 尺 >남짓한 좁은 1간< 間 >이다. 이 정자를 지키는 행랑집으로 지어진 고격< 古格 >있는 소가< 小家 >로서 굵은 각주< 角柱 >와 마루귀틀, 청판 등 건실하게 구성된 집이다. 이러한 방, 마루, 방, 부엌으로 연속되는 일자형< 一字形 > 구성은 남부지방< 南部地方 > 민가< 民家 >의 한 기본형< 基本形 >으로 가장 흔한 유형이지만 이집은 부엌을 전면< 前面 >으로 연장< 延長 >하였기 때문에 ㄱ자형< 字形 >이 된 것이다. 심수정< 心水亭 >은 1506년경< 年頃 >에 초건< 初建 >된 것이었다고 하나 철종< 哲宗 > 때에 한번 소실된 일이 있었고 지금의 집은 1917년< 年 > 중건< 重建 >한 것이라 전< 傳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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