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214-1
일반적인 ㅁ자< 字 > 또는 튼ㅁ자형< 字形 >에 따르지 않고 주거공간의 기능에 따라 집들을 분산< 分散 >·산개< 散開 >한 별격< 別格 >의 변화를 보이는 예< 例 >이다. 안채를 ㄱ자형< 字形 > 평면< 平面 >으로 끝낸점과 사랑채를 안채의 담밖에 완전 격리시킨 점은 가장 특색있는 변화라 하겠다. 특히 사랑채를 담장 밖으로 격리해서 차단한 것은 중부지방이나 호남의 대가에서도 좀체로 보기 어려운 배치방식이며 그 차단방식은 별당의 차단방식과 통한다는 점에서 사랑방에 대한 인식도가 매우 엄격한데 연유해서 채택된 방식< 方式 >으로 짐작된다. 사랑방이 외정< 外庭 >으로 돌출되는 배치는 이 마을의 약선당< 藥善堂 >(손영호씨 가옥)이다. 이원봉씨< 李源鳳氏 > 가옥< 家屋 >에서도 예를 볼 수가 있으나 그 경우에는 모두 안채와 구조 자체가 직접 연결되어 있을뿐 아니라 사랑방이 직접 안마당으로 면해 있거나 사랑 부엌을 통해 안채와 통로가 나 있다는 점에서 크게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랑채의 격리배치< 隔離配置 > 방식< 方式 >은 아마도 창건 당시 가주< 家主 >의 전통적< 傳統的 > 내외관< 內外觀 >이나 생활관< 生活觀 >에 따른 사상적< 思想的 > 배경< 背景 >이 작용< 作用 >한 결과< 結果 >로도 짐작된다. ㅁ자형< 字形 >이나 튼ㅁ자형< 字形 >의 폐쇄적< 閉鎖的 > 양식< 樣式 >이 일반화된 지역< 地域 >에서는 매우 특이한 배치계획< 配置計劃 >인 것이다. 사랑채는 전< 前 > ·후퇴< 後退 >를 가진 3간< 間 >집이므로 매우 소규모< 小規模 >, 간소한 형식< 形式 >이라 하겠으며 따라서 넓은 대청< 大廳 >이나 작은 사랑방은 생략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사랑방을 격리< 隔離 >한 특색< 特色 > 외에 또 다른 특색이라 하겠으며 아래 ·위 2간< 間 >의 방과 1간통< 間通 >의 마루, 툇마루의 평면구성< 平面構成 >은 소규모 서당< 書堂 >이나 소박한 정자< 亭子 >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으며 또한 그 가주< 家主 >의 사상적< 思想的 > 배경< 背景 >이 작용< 作用 >하고 있음을 생각케 한다. 안방과 부엌과의 고패 관계는 이지역 일반적인 분할방식< 方式 > 그대로이나 부엌은 길이가 3간< 間 >이나 된다. 건넌방은 1간< 間 >이 대청< 大廳 >으로 당겨져 그 옆간을 마루방으로 꾸몄으므로 전면< 前面 >의 툇마루, 대청< 大廳 >과 연결되는 3면< 面 >이 마루로 둘러싸이는 방이 되었다. 이 마루방은 안대청 한편에 소위 고방을 두는 영남 대가들의 종종 있는 예< 例 >에 불과하지만 ㄱ자< 字 >로 끝내고 있는 평면< 平面 >에서는 더욱 특이한 형식< 形式 >이라 하겠다. 이 집에서는 또 안채와 사랑채에 전혀 두리기둥을 쓰지 않고 있어 일면 검소한 주거관< 住居觀 >도 엿볼 수 있게 한다. 대문채는 3간< 間 >에 그쳤고 대문의 양편은 문간방과 고방이다. 아랫방 뒤편에 길이 4간< 間 >의 간막이 없는 헛간이 있어 지금 외양간으로 쓰이고 있으나 원래는 그 일부가 광으로 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랑방은 대문을 통하지 않고 담장을 오른편으로 돌면 이르게 된다. 사랑마당을 둘러싼 담장은 넓은 후원 언덕을 감돌아 이웃집 담장과 연결된다. 이 집의 가대< 家垈 >는 이 마을에서 가장 넓은 것으로 짐작되며 가승< 家乘 >에 그 창건< 創建 >은 1780년< 年 >이라 전< 傳 >한다.
일반적인 ㅁ자< 字 > 또는 튼ㅁ자형< 字形 >에 따르지 않고 주거공간의 기능에 따라 집들을 분산< 分散 >·산개< 散開 >한 별격< 別格 >의 변화를 보이는 예< 例 >이다. 안채를 ㄱ자형< 字形 > 평면< 平面 >으로 끝낸점과 사랑채를 안채의 담밖에 완전 격리시킨 점은 가장 특색있는 변화라 하겠다. 특히 사랑채를 담장 밖으로 격리해서 차단한 것은 중부지방이나 호남의 대가에서도 좀체로 보기 어려운 배치방식이며 그 차단방식은 별당의 차단방식과 통한다는 점에서 사랑방에 대한 인식도가 매우 엄격한데 연유해서 채택된 방식< 方式 >으로 짐작된다. 사랑방이 외정< 外庭 >으로 돌출되는 배치는 이 마을의 약선당< 藥善堂 >(손영호씨 가옥)이다. 이원봉씨< 李源鳳氏 > 가옥< 家屋 >에서도 예를 볼 수가 있으나 그 경우에는 모두 안채와 구조 자체가 직접 연결되어 있을뿐 아니라 사랑방이 직접 안마당으로 면해 있거나 사랑 부엌을 통해 안채와 통로가 나 있다는 점에서 크게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랑채의 격리배치< 隔離配置 > 방식< 方式 >은 아마도 창건 당시 가주< 家主 >의 전통적< 傳統的 > 내외관< 內外觀 >이나 생활관< 生活觀 >에 따른 사상적< 思想的 > 배경< 背景 >이 작용< 作用 >한 결과< 結果 >로도 짐작된다. ㅁ자형< 字形 >이나 튼ㅁ자형< 字形 >의 폐쇄적< 閉鎖的 > 양식< 樣式 >이 일반화된 지역< 地域 >에서는 매우 특이한 배치계획< 配置計劃 >인 것이다. 사랑채는 전< 前 > ·후퇴< 後退 >를 가진 3간< 間 >집이므로 매우 소규모< 小規模 >, 간소한 형식< 形式 >이라 하겠으며 따라서 넓은 대청< 大廳 >이나 작은 사랑방은 생략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사랑방을 격리< 隔離 >한 특색< 特色 > 외에 또 다른 특색이라 하겠으며 아래 ·위 2간< 間 >의 방과 1간통< 間通 >의 마루, 툇마루의 평면구성< 平面構成 >은 소규모 서당< 書堂 >이나 소박한 정자< 亭子 >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으며 또한 그 가주< 家主 >의 사상적< 思想的 > 배경< 背景 >이 작용< 作用 >하고 있음을 생각케 한다. 안방과 부엌과의 고패 관계는 이지역 일반적인 분할방식< 方式 > 그대로이나 부엌은 길이가 3간< 間 >이나 된다. 건넌방은 1간< 間 >이 대청< 大廳 >으로 당겨져 그 옆간을 마루방으로 꾸몄으므로 전면< 前面 >의 툇마루, 대청< 大廳 >과 연결되는 3면< 面 >이 마루로 둘러싸이는 방이 되었다. 이 마루방은 안대청 한편에 소위 고방을 두는 영남 대가들의 종종 있는 예< 例 >에 불과하지만 ㄱ자< 字 >로 끝내고 있는 평면< 平面 >에서는 더욱 특이한 형식< 形式 >이라 하겠다. 이 집에서는 또 안채와 사랑채에 전혀 두리기둥을 쓰지 않고 있어 일면 검소한 주거관< 住居觀 >도 엿볼 수 있게 한다. 대문채는 3간< 間 >에 그쳤고 대문의 양편은 문간방과 고방이다. 아랫방 뒤편에 길이 4간< 間 >의 간막이 없는 헛간이 있어 지금 외양간으로 쓰이고 있으나 원래는 그 일부가 광으로 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랑방은 대문을 통하지 않고 담장을 오른편으로 돌면 이르게 된다. 사랑마당을 둘러싼 담장은 넓은 후원 언덕을 감돌아 이웃집 담장과 연결된다. 이 집의 가대< 家垈 >는 이 마을에서 가장 넓은 것으로 짐작되며 가승< 家乘 >에 그 창건< 創建 >은 1780년< 年 >이라 전< 傳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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