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216
전체의 배치는 이 마을 큰집들 가운데 가장 일반적이며 기본형인 튼ㅁ자형< 字形 >을 이루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기능면의 변화가 안방과 부엌의 배치와 관련해서 나타나고 있다. 흔히 부엌으로 배정되는 왼쪽 끝간 자리에 안방을 두고 있어 부엌을 안방의 옆에 붙이는 일반형과 달리 안방 밑으로 붙이게 되었다. 부엌을 안방 밑에 붙이는 형식< 形式 >은 중부지방< 中部地方 > 민가< 民家 >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이 집의 경우 안방은 남향< 南向 >방이 되지 못하고 동향< 東向 >방이 되었고 부엌 밑에 방이나 마루 혹은 광을 두지 못하였으며 광은 분리된 아래채에만 두게 되었다. 이 집의 또 다른 변화는 안방머리에 반간< 半間 >의 찬방을 둔 점과 건넌방을 이원봉씨 집에서처럼 1간< 間 >을 대청쪽으로 당겨 놓은 점, 건넌방 다음 모서리 반간< 半間 >을 마루방으로 꾸민점 등이다. 건넌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고 건넌방 다음의 마루방에 직접 출입할 수 있는 문은 건넌방에만 달려 있어 마루방은 건넌방과 밀접한 기능을 갖게 된다. 평면상으로 보면 안방머리의 반간< 半間 > 찬방과 이 마루방은 좌우대칭< 左右對稱 >을 이루고 있으며 그 기능면에서도 중요한 수장< 收藏 >구실을 담당하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마루방 밑으로는 간살이가 좀 작은 온돌방과 이에 연접한 사랑방이 배치되고 있으며 작은 방과 직결되는 출입문은 사랑방에만 나 있어 일견< 一見 > 사랑 웃방 정도로 짐작되기도 하나 대략 큰사랑 건너편이나 바로 곁에 붙이는 자제용< 子弟用 >, 소위 작은사랑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집에는 노인들의 거처인 안사랑이 명목상 없는 것으로 된다. 사랑채의 기단은 잡석난적이며 그것을 2단으로 쌓아서 중간에 화계< 花階 >를 두고 여기에 화목< 花木 >을 심었고 사랑마당 북단상< 北壇上 >에 정< 正 >3간< 間 >, 측< 側 >1간< 間 >의 가묘< 家廟 >가 자리잡고 있다. 이 북단< 北壇 >의 석축에도 3단의 화계< 花階 >를 잡석으로 난적< 亂積 >하여 화목< 花木 >을 심어 사랑채 화계< 花階 >와 조화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또 이 마당의 자연 석벽 앞에는 오래묵은 느티나무들도 있어 사랑 후원< 後園 >이 의도적으로 조성되어 왔던 것을 짐작케 한다. 화계< 花階 >의 존재< 存在 >는 이 집의 두드러진 특색이 아닐 수 없다. 안대청 중심 기둥과 사랑대청 중심기둥을 두리기둥< 圓柱 >으로 쓴 것은 다른 집의 경우와 공통이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납도리 3량 구조에 홑처마이며 지붕은 몸채에서 팔작< 八作 >이나ㄷ자< 字 >의 양단< 兩端 >과 행랑채의 양단< 兩端 >은 모두 맞배지붕이다. 가승< 家乘 >에 1730년< 年 >(영조< 英祖 > 6년< 年 >)의 창건으로 전한다.
전체의 배치는 이 마을 큰집들 가운데 가장 일반적이며 기본형인 튼ㅁ자형< 字形 >을 이루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기능면의 변화가 안방과 부엌의 배치와 관련해서 나타나고 있다. 흔히 부엌으로 배정되는 왼쪽 끝간 자리에 안방을 두고 있어 부엌을 안방의 옆에 붙이는 일반형과 달리 안방 밑으로 붙이게 되었다. 부엌을 안방 밑에 붙이는 형식< 形式 >은 중부지방< 中部地方 > 민가< 民家 >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이 집의 경우 안방은 남향< 南向 >방이 되지 못하고 동향< 東向 >방이 되었고 부엌 밑에 방이나 마루 혹은 광을 두지 못하였으며 광은 분리된 아래채에만 두게 되었다. 이 집의 또 다른 변화는 안방머리에 반간< 半間 >의 찬방을 둔 점과 건넌방을 이원봉씨 집에서처럼 1간< 間 >을 대청쪽으로 당겨 놓은 점, 건넌방 다음 모서리 반간< 半間 >을 마루방으로 꾸민점 등이다. 건넌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고 건넌방 다음의 마루방에 직접 출입할 수 있는 문은 건넌방에만 달려 있어 마루방은 건넌방과 밀접한 기능을 갖게 된다. 평면상으로 보면 안방머리의 반간< 半間 > 찬방과 이 마루방은 좌우대칭< 左右對稱 >을 이루고 있으며 그 기능면에서도 중요한 수장< 收藏 >구실을 담당하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마루방 밑으로는 간살이가 좀 작은 온돌방과 이에 연접한 사랑방이 배치되고 있으며 작은 방과 직결되는 출입문은 사랑방에만 나 있어 일견< 一見 > 사랑 웃방 정도로 짐작되기도 하나 대략 큰사랑 건너편이나 바로 곁에 붙이는 자제용< 子弟用 >, 소위 작은사랑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집에는 노인들의 거처인 안사랑이 명목상 없는 것으로 된다. 사랑채의 기단은 잡석난적이며 그것을 2단으로 쌓아서 중간에 화계< 花階 >를 두고 여기에 화목< 花木 >을 심었고 사랑마당 북단상< 北壇上 >에 정< 正 >3간< 間 >, 측< 側 >1간< 間 >의 가묘< 家廟 >가 자리잡고 있다. 이 북단< 北壇 >의 석축에도 3단의 화계< 花階 >를 잡석으로 난적< 亂積 >하여 화목< 花木 >을 심어 사랑채 화계< 花階 >와 조화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또 이 마당의 자연 석벽 앞에는 오래묵은 느티나무들도 있어 사랑 후원< 後園 >이 의도적으로 조성되어 왔던 것을 짐작케 한다. 화계< 花階 >의 존재< 存在 >는 이 집의 두드러진 특색이 아닐 수 없다. 안대청 중심 기둥과 사랑대청 중심기둥을 두리기둥< 圓柱 >으로 쓴 것은 다른 집의 경우와 공통이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납도리 3량 구조에 홑처마이며 지붕은 몸채에서 팔작< 八作 >이나ㄷ자< 字 >의 양단< 兩端 >과 행랑채의 양단< 兩端 >은 모두 맞배지붕이다. 가승< 家乘 >에 1730년< 年 >(영조< 英祖 > 6년< 年 >)의 창건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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