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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지 -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생산하던 도요지

by 넥스루비 2007. 8. 7.
웅천도요지는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생산하던 곳으로 보배산(보개산) 기슭의 점골에 위치하고 있다. 두동요지,금곡요지 등으로 알려져 있으며 "두동요지"라고 하는것이 타당할 것이다. 가마터의 지표면에서 채집되는 유물은 귀얄문과 덤벙문분청사기이며 가마터는 도굴로 상당히 파괴되었고 지표면의 유물도 일본까지 반출 되어 흔적이 미미하다. 분청사기는 14세기 중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15세기 초에는 다양한 기법으로 발전하여 전성기를 맞지만 16세기 중엽부터 자취를 감추게된다. 한국인의 소박한 감정을 가장 꾸밈없이 보여주는 그릇으로, 회색 또는 회흑색의 태토위에 정선된 백토로 표면을 분장한 뒤에 유약을 씌워 환원염에서 구웠다. 분청사기의 태토는 근본적으로 청자와 비슷하나 한층 더 흑회색을 띠고 있고, 유약은 청자에 비하여 철분의 함유량이 적으며 주로 담청색의 청자유와 황색을 띤 투명한 백색유로 시유되었다. 귀얄문 분청사기는 올이 굵은 풀비같은 붓(귀얄)의 분장자국이 빠른 운동감에 의해서 문양으로 남는데 이는 주로 15세기 후반에 생산되었다. 덤벙문 분청사기는 분장할때 그릇의 굽을 잡고 담구어서 분장을 한 것으로 표면이 차분하여 얼핏보면 백자와도 같다. 담급법의 덤벙문 분청사기는 백자로 변해가는 마지막 단계인 16세기에 나타나는 제작법이다. 따라서 이곳 웅천도요지는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중엽까지 가마가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15-16세기의 분청사기 가마터는 오름가마(등요)로 경사를 따라 양벽을 점토로 쌓아 올려 궁륭형의 천정을 만들고 내부에 칸막이(격벽)를 설치하여 몇개의 칸으로 나누었다. 또한 격벽의 밑에는 통염공을 두었는데 웅천도요지의 가마터도 정식 학술조사가 이루어지면 주고를 파악할수 있을것이다. 또한 소도동에도 인화문분청사기, 백자등을 굽던 가마터가 있었으나 유구가 파괴되고 매몰되어 정식 학술조사를 하기전에는 성격을 규명 하기 어렵다.


[대중교통]
진해시내에서 시내버스 105번 버스편으로 약 30분 거리인 두동에서 하차,다시 진해시공영버스를 이용 약 5분 소요,도보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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