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천읍성은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종 16년(1434년)에 처음으로 축성하였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 16년에 김해읍성과 웅천읍성의 축조시기에 대한 논의에서 김해읍성과 웅천읍성을 다 같이 수축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세종 17년(1435년)에는 웅천읍성이 완공되지 않아 결국 각 포진의 수군을 동원하여 완공하도록 기록하고 있다. 또한 경상도속찬지리지의 읍성조에도 세종 16년에 축성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므로 세종실록의 기사와 부합된다. 그후 단동 1년(1453년0에는 체성을 증축하고 성밖에 해자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세조 3년(1457년) 삼도의 도순찰사 박강과 부사 구치관등이 웅천읍성이 협소하여 서쪽에 다시 축성할것을 건의하여 이를 시행하였으며 그뒤 중종 36년(1541년)에는 성을 다시 중축하고 성밖의 민가 300여호를 성안으로 옮기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웅천읍지의 성지조에 성곽의 둘레가 전혀 변동이 없으므로 이러한 증축이나 개축이 다 이루어졌다고는 보기 어렵다. 웅천읍성은 장방형 석축성으로 기단부를 이중으로조성하고 자연대석을 사용하여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도한 동서남북의 정방에 옹성형 문지를 두었으며 각 문지의 좌우와 성곽의 네모퉁이에 곡성과 적대를 둔 전형적인 읍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성이다. 총연장 936M(현존둘레 500M), 폭 4.5M, 높이 4.4M 이르고 있으며 동벽은 대체로 온전히 남아 있으나 남벽 및 서벽은 대부분 훼손되어 일부만 남아있고 북벽은 국도를 내면서 파괴되어 기단부만 매몰되어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웅천읍성은 중종조의 삼포왜란과 선조조의 임진왜란으로 한때 함몰되기도 하였으며 현성으로서의 행정적인 기능은 문종 2년(1452년) 웅신현과 완포현, 그리고 천읍부곡을 합하여 웅천현으로 승격된 이후부터이다. 공해는 동헌객사, 장적고, 향사당, 인리청, 군관청, 장관청, 훈도청, 지인방, 사령방등이 있었으며 문루는 동문의 견륭루, 서문의 수호루, 남문의 진남루, 객사문루인 정해루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대중교통]
진해시내에서 부산방면으로 105번 버스를 이용하여 30분, 웅천초등학교에서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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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시내에서 부산방면으로 105번 버스를 이용하여 30분, 웅천초등학교에서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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