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5
태고사원증국사탑비는 현재 북한산 태고사 법당 우측에 목조(木造)와 화강암의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넓직한 정방형의 지대석(地臺石)위에 귀부(龜趺)를 안치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세웠으며 꼭대기에 이수를 놓은, 통일신라시대 이래 고려시대까지 유행된 일반적인 탑비 형식(塔碑形式)을 갖추고 있다. 큼직한 귀부의 뒷면에는 6각의 귀갑문(龜甲文)이 길쭉하게 조각되있고, 용의 머리모습과 흡사한 귀두(龜頭)는 윗부분을 향하여였으며, 두 눈을부리부리하게 뜨고 입도 크게 별렸으며, 옆으로 벌려 이빨만 보인다. 모든 부분의 조각은 형식화에 흐르고 있다. 뒷면 윗부분에 비좌를 마련하고 석비를 세웠는데 아래쪽 끝을 귀부 윗부분에 꽂는 형식이다.
비신(碑身)은 장방형으로 앞면에 본문을 새기고 뒷면에는 음기(陰記)가 있으며, 앞면 윗부분에 "원증국사탑명(圓證國師塔銘)"이란 6자의 제액(題額)이 있다. 이수는 밑면에 낮은 1단의 받침이 있고 그 밖으로 앙련문이 돌려졌으며, 위에는 운룡(雲龍)이 새겨 있다.
현재 전체높이 3.42m, 비신높이 2.27m, 옥개석(屋蓋石) 높이 0.55m의 규모이다. 이 석비는 고려말의 명승인 보우대사(普愚大師)의 부도탑비(浮屠塔碑)로서 대사의 출생부터 입적에 이르기까지의 내력을 적은 것이다.
이 비문에 의하면 원증국사의 이름은 보우(普愚)이며, 호는 태고(太古), 속성은 홍씨(洪氏)이다. 본관은 홍주로 아버지는 연(延)씨,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며, 충렬왕 27년(1301)에 출생하였다. 13세에 출가하여 회엄사의 광지선사를 사사(師事)한 후 많은 사찰을 다니면서 수학(修學)에 전념하였다. 46세에는 중국에 다녀왔는데, 이 후 재차 중국에 갔을 때에는 순제가 소식을 듣고 영령사에 개당하여 금란가사 침향 불자등을 하사 하였다고 한다.
공민왕이 광명사(廣明寺) 원융부를 세우자 왕사(王師)가 되었다가 신돈의 횡포를 미워하여 소설사(小雪寺)에 은거하였으며, 이후 그곳에서 우왕 8년(1382)에 입적하였다.
태고사는 충혜왕복위 2년(1341)에 대사가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 주석(住錫)하면서 창건한 것이다. 비각은 석주(石柱)만 남아 있던 것을 1979년에 복원한 것이다.
[승용차]
서울 구파발에서 의정부쪽으로 가다가 북한산성 입구쪽으로 가다보면 주차장이 있다.
[대중교통]
구파발에서 북한산성행 버스를 타고 북한산성 입구에서 내린다.
태고사원증국사탑비는 현재 북한산 태고사 법당 우측에 목조(木造)와 화강암의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넓직한 정방형의 지대석(地臺石)위에 귀부(龜趺)를 안치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세웠으며 꼭대기에 이수를 놓은, 통일신라시대 이래 고려시대까지 유행된 일반적인 탑비 형식(塔碑形式)을 갖추고 있다. 큼직한 귀부의 뒷면에는 6각의 귀갑문(龜甲文)이 길쭉하게 조각되있고, 용의 머리모습과 흡사한 귀두(龜頭)는 윗부분을 향하여였으며, 두 눈을부리부리하게 뜨고 입도 크게 별렸으며, 옆으로 벌려 이빨만 보인다. 모든 부분의 조각은 형식화에 흐르고 있다. 뒷면 윗부분에 비좌를 마련하고 석비를 세웠는데 아래쪽 끝을 귀부 윗부분에 꽂는 형식이다.
비신(碑身)은 장방형으로 앞면에 본문을 새기고 뒷면에는 음기(陰記)가 있으며, 앞면 윗부분에 "원증국사탑명(圓證國師塔銘)"이란 6자의 제액(題額)이 있다. 이수는 밑면에 낮은 1단의 받침이 있고 그 밖으로 앙련문이 돌려졌으며, 위에는 운룡(雲龍)이 새겨 있다.
현재 전체높이 3.42m, 비신높이 2.27m, 옥개석(屋蓋石) 높이 0.55m의 규모이다. 이 석비는 고려말의 명승인 보우대사(普愚大師)의 부도탑비(浮屠塔碑)로서 대사의 출생부터 입적에 이르기까지의 내력을 적은 것이다.
이 비문에 의하면 원증국사의 이름은 보우(普愚)이며, 호는 태고(太古), 속성은 홍씨(洪氏)이다. 본관은 홍주로 아버지는 연(延)씨,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며, 충렬왕 27년(1301)에 출생하였다. 13세에 출가하여 회엄사의 광지선사를 사사(師事)한 후 많은 사찰을 다니면서 수학(修學)에 전념하였다. 46세에는 중국에 다녀왔는데, 이 후 재차 중국에 갔을 때에는 순제가 소식을 듣고 영령사에 개당하여 금란가사 침향 불자등을 하사 하였다고 한다.
공민왕이 광명사(廣明寺) 원융부를 세우자 왕사(王師)가 되었다가 신돈의 횡포를 미워하여 소설사(小雪寺)에 은거하였으며, 이후 그곳에서 우왕 8년(1382)에 입적하였다.
태고사는 충혜왕복위 2년(1341)에 대사가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 주석(住錫)하면서 창건한 것이다. 비각은 석주(石柱)만 남아 있던 것을 1979년에 복원한 것이다.
[승용차]
서울 구파발에서 의정부쪽으로 가다가 북한산성 입구쪽으로 가다보면 주차장이 있다.
[대중교통]
구파발에서 북한산성행 버스를 타고 북한산성 입구에서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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