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황남동 209와 227 중간도로
손시양은 고려시대< 高麗時代 > 사람으로 부모가 돌아가시자 각 3년씩 묘소에 여막을 지어 놓고 묘를 지킴으로 당시 유수< 留守 >가 왕에게 상신하여 집에 정표를 내리니 지금의 정려비이다. 이 비석< 碑石 >은 고려 명종< 明宗 > 12년(1182)에 세워졌으며, 후면에는 5행 130자로 손시양의 효행< 孝行 > 내용과 정려비의 입비< 立碑 > 경위가 새겨진 명문< 銘文 >이 있다. 이 정려비는 손시양의 효행을 널리 알려 백성이 지켜야 할 효도정신< 孝道精神 >을 고취시키던 유서 깊은 비석으로서, 노천에 서 있던 것을 1977년에 기단< 基壇 >을 설치하고 보호각< 保護閣 >을 건립하였다. 비신높이는 약 2m이다.
손시양은 고려시대< 高麗時代 > 사람으로 부모가 돌아가시자 각 3년씩 묘소에 여막을 지어 놓고 묘를 지킴으로 당시 유수< 留守 >가 왕에게 상신하여 집에 정표를 내리니 지금의 정려비이다. 이 비석< 碑石 >은 고려 명종< 明宗 > 12년(1182)에 세워졌으며, 후면에는 5행 130자로 손시양의 효행< 孝行 > 내용과 정려비의 입비< 立碑 > 경위가 새겨진 명문< 銘文 >이 있다. 이 정려비는 손시양의 효행을 널리 알려 백성이 지켜야 할 효도정신< 孝道精神 >을 고취시키던 유서 깊은 비석으로서, 노천에 서 있던 것을 1977년에 기단< 基壇 >을 설치하고 보호각< 保護閣 >을 건립하였다. 비신높이는 약 2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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