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산99-1 용문사
이 부도는 지대석< 地臺石 >과 하대석< 下臺石 >이 방형< 方形 >이고 중대석< 中臺石 >이 원형< 圓形 >이며 그 위가 8각형< 八角形 >의 평면이나 팔각원당형< 八角圓堂型 >의 기본형을 따른 것이다. 석비< 石碑 >는 장방형< 長方形 > 대석< 臺石 > 위에 개석< 蓋石 > 없이 비신< 碑身 >을 세웠는데 상단 좌·우를 귀접이하였다. 이 부도는 미지산< 彌智山 >(현 용문산< 龍文山 >)에 조안< 祖眼 > 등이 세운 것이며, 비는 태조< 太祖 > 7년(1398) 당시 학자이며 명신< 名臣 >이었던 권근< 權近 >의 글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정지국사< 正智國師 >(1324∼1395)는 고려말< 高麗末 >의 고승< 高僧 >으로 호< 號 >는 축원< 竺源 >, 속명< 俗名 >은 김지천< 金智泉 >이다. 고려 충숙왕< 忠肅王 > 11년(1324) 황해도< 黃海道 > 재령< 載寧 >에서 태어나 19세에 장수산< 長壽山 > 현암사< 懸巖寺 >에서 승려가 되었다. 공민왕< 恭愍王 > 2년(1353) 30세에 자초< 自超 >(무학대사< 無學大師 >)와 함께 중국< 中國 > 연경< 燕京 >에 들어가 법원사의 지공< 指空 >을 찾아보고 그에게 법을 이어받은 혜근< 惠勤 >(나옹선사< 懶翁禪師 >)에게 사사< 師事 >하였다. 그 뒤 함께 각지로 다니며 수도< 修道 >하다가 공민왕< 恭愍王 > 5년(1356)에 귀국하였다. 벼슬이 싫어 몸을 숨기고 수행에만 힘쓰다가 천마산< 天磨山 > 적멸암< 寂滅庵 >에서 입적< 入寂 >하였는데 화장< 火葬 > 후 많은 사리< 舍利 >가 나왔다. 정지국사로 추증< 追贈 >되었으며, 시호< 諡號 >는 정지이다.
이 부도는 지대석< 地臺石 >과 하대석< 下臺石 >이 방형< 方形 >이고 중대석< 中臺石 >이 원형< 圓形 >이며 그 위가 8각형< 八角形 >의 평면이나 팔각원당형< 八角圓堂型 >의 기본형을 따른 것이다. 석비< 石碑 >는 장방형< 長方形 > 대석< 臺石 > 위에 개석< 蓋石 > 없이 비신< 碑身 >을 세웠는데 상단 좌·우를 귀접이하였다. 이 부도는 미지산< 彌智山 >(현 용문산< 龍文山 >)에 조안< 祖眼 > 등이 세운 것이며, 비는 태조< 太祖 > 7년(1398) 당시 학자이며 명신< 名臣 >이었던 권근< 權近 >의 글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정지국사< 正智國師 >(1324∼1395)는 고려말< 高麗末 >의 고승< 高僧 >으로 호< 號 >는 축원< 竺源 >, 속명< 俗名 >은 김지천< 金智泉 >이다. 고려 충숙왕< 忠肅王 > 11년(1324) 황해도< 黃海道 > 재령< 載寧 >에서 태어나 19세에 장수산< 長壽山 > 현암사< 懸巖寺 >에서 승려가 되었다. 공민왕< 恭愍王 > 2년(1353) 30세에 자초< 自超 >(무학대사< 無學大師 >)와 함께 중국< 中國 > 연경< 燕京 >에 들어가 법원사의 지공< 指空 >을 찾아보고 그에게 법을 이어받은 혜근< 惠勤 >(나옹선사< 懶翁禪師 >)에게 사사< 師事 >하였다. 그 뒤 함께 각지로 다니며 수도< 修道 >하다가 공민왕< 恭愍王 > 5년(1356)에 귀국하였다. 벼슬이 싫어 몸을 숨기고 수행에만 힘쓰다가 천마산< 天磨山 > 적멸암< 寂滅庵 >에서 입적< 入寂 >하였는데 화장< 火葬 > 후 많은 사리< 舍利 >가 나왔다. 정지국사로 추증< 追贈 >되었으며, 시호< 諡號 >는 정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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