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안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빙고. 월성의 북쪽 성둑을 잘라서 남쪽에 입구를 내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을 경사지게 하여 얼음에서 녹아내린 물이 성밖으로 배출되도록 바닥 중앙에 배수로가 설치되었다.
내부는 동서로 홍예(虹霓, 무지개) 5개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에 장대석을 걸쳐서 천장을 삼았고 북쪽 벽은 수직으로 쌓았다. 홍예와 홍예 사이의 천장에는 세 곳에 배기공(排氣空)을 설치하였는데 현재 배기공 위를 덮고 있는 석재는 근대의 수리때 석탑의 옥개석을 사용한 것으로 원래의 것은 아니다. 출입구 높이는 1.78m, 너비 2.01m의 크기로 만들고, 계단을 설치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제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때부터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다고 하였으며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지증마립간 6년 11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경주 월성내의 석빙고는 빙고 좌측에 있는 석비(石碑)에 의하면, 1738년(영조 14년) 당시 경주 부윤이던 조명겸(趙明謙)이 목조(木造)의 빙고를 석조(石造)의 빙고로 다시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빙고 입구 이맛돌에는 '숭정기원후재신유이기개축(崇禎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 쓰여 있어 4년 뒤에 동쪽으로 100m 정도 옮겨 현 위치에 재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옮기기 전의 옛 위치는 서쪽에 웅덩이로 남아 있다.
현재 영조 당시 축조한 석빙고가 위와 같이 여러 곳에 남아 있으나 그 중에서도 이 빙고가 가장 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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