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천군동
이 산성은 경주시< 慶州市 >의 동쪽에 해당되는 이곳 명활산< 明活山 >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둘레를 따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신라시대< 新羅時代 >의 석축성< 石築城 >으로 전체 길이는 약 6km에 이른다. 성을 쌓은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신라 실성왕< 實聖王 > 4년(405)에 명활성을 공격해온 왜병을 격퇴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축성< 築城 >에 가공되지 않은 잔연석을 이용한 점 등을 미루어 서기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남은 것은 진평왕< 眞平王 > 때에 개축< 改築 >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선덕여왕< 善德女王 > 몰년< 沒年 >(647)에 비담< 毗曇 > 등이 왕위< 王位 >를 노려 이곳을 근거로 반란< 叛亂 >을 일으켰으나 김유신< 金庾信 > 장군이 평정했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이 산성은 경주의 서쪽에 있는 선도산성< 仙桃山城 >, 남쪽의 남산성< 南山城 >과 함께 신라의 도성< 都城 >을 지키기 위해 동쪽에 마련한 산성임을 알 수 있다.
이 산성은 경주시< 慶州市 >의 동쪽에 해당되는 이곳 명활산< 明活山 >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둘레를 따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신라시대< 新羅時代 >의 석축성< 石築城 >으로 전체 길이는 약 6km에 이른다. 성을 쌓은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신라 실성왕< 實聖王 > 4년(405)에 명활성을 공격해온 왜병을 격퇴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축성< 築城 >에 가공되지 않은 잔연석을 이용한 점 등을 미루어 서기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남은 것은 진평왕< 眞平王 > 때에 개축< 改築 >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선덕여왕< 善德女王 > 몰년< 沒年 >(647)에 비담< 毗曇 > 등이 왕위< 王位 >를 노려 이곳을 근거로 반란< 叛亂 >을 일으켰으나 김유신< 金庾信 > 장군이 평정했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이 산성은 경주의 서쪽에 있는 선도산성< 仙桃山城 >, 남쪽의 남산성< 南山城 >과 함께 신라의 도성< 都城 >을 지키기 위해 동쪽에 마련한 산성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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