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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사지 - 문두루비법의 중심도장이었던 유서깊은 절터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북 경주시 외동읍 모화1∼4리

통일신라시대의 절인 원원사의 절터로서 외동읍 모화리에서 동북골짜기를 약 30분 거슬러 오르면 석축위에 근래 지은 절집들이 있고 이 절집 위에 폐사지를 볼 수 있다.
원원사는 신라 신인종의 개조인 명랑법사가 세운 사천왕사, 금광사와 함께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문두루비법의 중심도장이었던 유서깊은 절이다.

신인종이란 선덕여왕 4년(653년) 명랑법사가 당에서 귀국할 때 처음으로 신라에 전한 시인비법을 씀으로써 보급된 밀교의 일파로서 삼국통일에 지대한 공헌을 한 종파였다. 명랑법사는 문무왕때 낭산 남쪽 신유림에 밀달을 마련하고 문두루비법을 베풀어 당병의 침입을 물리친 것을 계기로 신인종의 개조가 되었고 신라 호국 불교의 전위적 역할을 하였다.

원원사는 그 밀교의 후계자들인 안혜, 낭융 등과 김유신, 김의원, 김술종 등 국사를 논의하던 중요한 인물들이 함께 뜻을 모아 국가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하여 세운 호국사찰이다.
또한 안혜, 낭융과 그의 후예인 광학, 대연 등 4대덕의 유골이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혔으므로 이때문에 사영산조사암이라 했는데 광학, 대연은 고려 태조를 따라 송도로 간 사람이니 절의 창건에 참여한 밀교승은 아혜, 낭융뿐이라 할 것이다.

원래 사찰명은 <삼국유사>에도 보이듯이 원원사(遠源寺)이었는데 조선조 사서인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원원사로 기록된 이후부터는 모두 후자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권오찬 선생은 창건동기가 통일된 신라의 영원한 번영을 염원하여 울산만을 침입해오는 왜병을 막고자 불력을 기울인 것으로 미루어 원원사라는 명칭이 타당하지 않나 하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또한 동경잡기에는 숭정 경오년(조선 16대 인조 8년, 1630년)에 중수하였으나 26년 뒤인 병신년(조선 17대 효중7년, 1656년)에 원원사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러나 곧 중건되었다고 기록으로 전하고 있어 조선후기까지 법등이 계속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절터는 1927년 불국사에서 여관업을 하고 있던 일본인 스기야마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절은 극도로 황폐화되어 있었으며 특히 금당사 전방에 묘를 쓴 자가 미신 때문에 동서탑을 무너뜨려서 부근의 낮은 곳으로 굴러버려 손을 댈 수가 없었던 것을 경도제국대학 공학부 건축학교수실 조수 能勢丑三이 1931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당시 행정문서와 논문잡지에 소개된 것으로 미루어 能勢丑三은 절터가 발견된 3년 뒤인 조선총독부에 8백원의 예산으로 약 120년전에 도괴된 이 탑을 현 위치에 보존하려고 건의서를 제출하고 있다. 그로부터 1년 뒤 가을에 탑을 재건하고 금당과 돌계단을 정리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문두루비법

문두루비법이란 신라와 고려시대에 행하였던 밀교의식의 하나로 신라의 명랑(明郞)이 중국에서 밀교를 배운 뒤 선덕여왕 4년(635)에 귀국할 때 처음으로 전하였다. 문무왕때 당나라 군사가 신라를 침략할게 되자 왕은 명랑에게 적을 물리칠 비방을 물었다. 이에 명랑은 낭산(狼山)의 남쪽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 것을 제의하였는데 당군의 침략으로 시간이 급박하여 채백(彩帛)으로 가건물을 짓고 5방(方)에 신상(神像)을 세운 뒤 유가명승(瑜伽明僧) 12인과 함께 문무루 비법을 썼다.
그때 신라군이 아직 접근하기도 전에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고 한다. 문두루는 범어 무드라(Mudra)의 음사(音寫)로서 신인(神印)으로 번역된다.
명랑에의해서 처음으로 신라에 전해진 이 비법은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佛說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에 의한 것으로 이 경에 의하여 불단(佛壇)을 설치하고 다라니 등을 독송하면 국가재난을 물리치고 국가를 수호하여 사회를 편안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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