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노서동 104
경주시내 평지<平地>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시대 고분군 중 서북쪽 부분으로 현재 10여기<餘基>의 대소<大小> 고분이 남아 있다. 외형상<外形上>으로는 모두 봉토분<封土墳>이며 원형분<圓形墳>이 많지만 표형쌍분<瓢形雙墳>도 포함되어 있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원형분<圓形墳>인 제130호분은 노동동 고분군의 봉황대<鳳凰臺>(제125호분)에 대한 대칭으로 서봉황대<西鳳凰臺>라 불리고 있으며, 황남동 고분군의 황남대총<皇南大塚>(제98호분)과 함께 경주시내 고분군 가운데 최대형 고분에 속한다. 이 고분군에서 발굴된 고분들의 내부구조는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지는데 금관총<金冠塚>(제128호분), 서봉총<瑞鳳塚>(제129호분), 호우총<壺우塚>과 은령총<銀鈴塚>(제140호분) 제138호분 등은 고신라<古新羅> 특유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었고, 쌍상총<雙床塚>(제137호분), 마총<馬塚>(제133호분), 우총<牛塚> 등은 통일신라기<統一新羅基>의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었다. 금관총<金冠塚>은 1921년 우연히 유물층이 노출되어 수습조사되었는데, 최초로 금관<金冠>과 금제과대<金製과帶>를 비롯한 각종 호화 유물이 출토되어 경주<慶州>와 신라고분<新羅古墳>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1926년에 발굴조사된 서봉총<瑞鳳塚>은 표형쌍분<瓢形雙墳>의 북분<北墳>으로 봉황형 장식<鳳凰形 裝飾>을 얹은 금관<金冠>이 출토되었고, 마침 발굴 당시 내방한 스웨덴 황태자(서전 황태자<瑞典 皇太子>)를 기념하여 서봉총<瑞鳳塚>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서봉총<瑞鳳塚>에서는[연수원년신묘<延壽元年辛卯>]명문<銘文>이 있는 은합<銀盒>이 출토되었는데, 신묘<辛卯>는 서기 391년 또는 451년으로 추정된다. 해방 후 최초의 유적 발굴이었던 1946년 호우총<壺우塚> 조사에서는 고구려<高句麗>에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기념하여 을묘년<乙卯年>(서기 415년)에 만들었다는 명문<銘文>이 있는 동합<銅盒>이 출토되어 유명하다. 이상의 고분들은 경주시내 평지 고분군<平地 古墳群>의 일반적인 형식으로,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인 목곽<木槨>이 냇돌로 쌓은 적석부<積石部>로 덮여 있고 그 위에 봉토<封土>를 축조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었으며 시기적으로는 약간 늦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에 속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쌍상총<雙床塚>, 마총<馬塚>, 우총<牛塚> 등은 봉토<封土> 내부에 깬돌로 평면 사각형의 석실<石室>을 축조한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으로 연도<羨道>는 남쪽으로 두었고 석실의 천정은 궁륭상<穹륭狀>으로 만들어졌다. 이들은 경주분지 주변의 산지에 주로 축조된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 경주시내 고분군에도 일부 존재함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경주에서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은 6세기 전반기부터 등장하나 이 고분들은 석실의 구조와 내부에서 출토된 토기편들로 보아 그보다는 늦은 통일신라<統一新羅>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쌍상총<雙床塚>에는 합장용<合葬用>의 시상<屍床> 위에 인형<人形>을 음각<陰刻>한 석제시대<石製屍臺>와 석침 족좌<石枕 足座>가 놓여 있었고, 완전 도굴분이나 내부에서 말뼈가 나왔다 하여 이름이 붙여진 마총<馬塚>에는 연문<羨門>에 석비<石扉>가 아니라 목비<木扉>를 세웠던 흔적이 있었다.
경주시내 평지<平地>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시대 고분군 중 서북쪽 부분으로 현재 10여기<餘基>의 대소<大小> 고분이 남아 있다. 외형상<外形上>으로는 모두 봉토분<封土墳>이며 원형분<圓形墳>이 많지만 표형쌍분<瓢形雙墳>도 포함되어 있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원형분<圓形墳>인 제130호분은 노동동 고분군의 봉황대<鳳凰臺>(제125호분)에 대한 대칭으로 서봉황대<西鳳凰臺>라 불리고 있으며, 황남동 고분군의 황남대총<皇南大塚>(제98호분)과 함께 경주시내 고분군 가운데 최대형 고분에 속한다. 이 고분군에서 발굴된 고분들의 내부구조는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지는데 금관총<金冠塚>(제128호분), 서봉총<瑞鳳塚>(제129호분), 호우총<壺우塚>과 은령총<銀鈴塚>(제140호분) 제138호분 등은 고신라<古新羅> 특유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었고, 쌍상총<雙床塚>(제137호분), 마총<馬塚>(제133호분), 우총<牛塚> 등은 통일신라기<統一新羅基>의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었다. 금관총<金冠塚>은 1921년 우연히 유물층이 노출되어 수습조사되었는데, 최초로 금관<金冠>과 금제과대<金製과帶>를 비롯한 각종 호화 유물이 출토되어 경주<慶州>와 신라고분<新羅古墳>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1926년에 발굴조사된 서봉총<瑞鳳塚>은 표형쌍분<瓢形雙墳>의 북분<北墳>으로 봉황형 장식<鳳凰形 裝飾>을 얹은 금관<金冠>이 출토되었고, 마침 발굴 당시 내방한 스웨덴 황태자(서전 황태자<瑞典 皇太子>)를 기념하여 서봉총<瑞鳳塚>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서봉총<瑞鳳塚>에서는[연수원년신묘<延壽元年辛卯>]명문<銘文>이 있는 은합<銀盒>이 출토되었는데, 신묘<辛卯>는 서기 391년 또는 451년으로 추정된다. 해방 후 최초의 유적 발굴이었던 1946년 호우총<壺우塚> 조사에서는 고구려<高句麗>에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기념하여 을묘년<乙卯年>(서기 415년)에 만들었다는 명문<銘文>이 있는 동합<銅盒>이 출토되어 유명하다. 이상의 고분들은 경주시내 평지 고분군<平地 古墳群>의 일반적인 형식으로,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인 목곽<木槨>이 냇돌로 쌓은 적석부<積石部>로 덮여 있고 그 위에 봉토<封土>를 축조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었으며 시기적으로는 약간 늦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에 속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쌍상총<雙床塚>, 마총<馬塚>, 우총<牛塚> 등은 봉토<封土> 내부에 깬돌로 평면 사각형의 석실<石室>을 축조한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으로 연도<羨道>는 남쪽으로 두었고 석실의 천정은 궁륭상<穹륭狀>으로 만들어졌다. 이들은 경주분지 주변의 산지에 주로 축조된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 경주시내 고분군에도 일부 존재함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경주에서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은 6세기 전반기부터 등장하나 이 고분들은 석실의 구조와 내부에서 출토된 토기편들로 보아 그보다는 늦은 통일신라<統一新羅>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쌍상총<雙床塚>에는 합장용<合葬用>의 시상<屍床> 위에 인형<人形>을 음각<陰刻>한 석제시대<石製屍臺>와 석침 족좌<石枕 足座>가 놓여 있었고, 완전 도굴분이나 내부에서 말뼈가 나왔다 하여 이름이 붙여진 마총<馬塚>에는 연문<羨門>에 석비<石扉>가 아니라 목비<木扉>를 세웠던 흔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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