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노동동 261
경주분지 중심부인 노동동에 분포되어 있는 고분은 대형분으로 사적 125호 봉황대<鳳凰臺>고분·126호 식리총<飾履塚>·127호 금령총<金鈴塚>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봉황대고분은 단일고분으로서는 황남대총 다음으로 규모가 큰 고분인데, 분구의 저경 82m·높이 22m이다. 이외에 1924년 발굴된 금령총·식리총 등은 발굴 후 분구는 남아 있지 않으나, 초기에 발굴된 고분으로서 금제품 등 다양한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유명하다. 여기 고분들의 분구형태는 원형봉토분 형식이고, 내부의 매장주체시설은 적석목곽분의 구조형식이다. 금령총은 봉황대고분의 남쪽 근거리에서 발견되었는데, 분구는 거의 전부 삭평되고 서남부의 약간만 잔존하고 있었다. 발굴조사로 추측할 수 있는 규모는 저경 약 18-20m·높이 4-5m 정도의 소형 고분이다. 지표하 약 2m ·지면하 2m에 동서길이 3.1m·남북길이 2.7m·깊이 2.8m 정도의 광을 파고 바닥과 벽에 기대어 냇돌로 석곽을 만들고, 이 석곽 안에 동서 4.28m·남북 3.8m·높이1.82m 가량의 목곽(목실)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저경 10.5m 지면높이 1m 가량 되게 냇돌로 된 원방형<圓方形>의 적석부를 올렸다. 부장유물로는 금관·금제이식·금제팔지·금제요대·동제신발·철제솟·칠기·유리제완·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유물로는 백화수피제채화관모<白樺樹皮製彩畵冠帽> 7개·배형(주형<舟形>)토기·기마인물상<騎馬人物像>토기·방제백유경<倣製白乳鏡> 등이다. 금관의 규모가 작고 소형 방울이 있으며, 또 시체자리가 1m 정도밖에 안되는 소형인 점 등으로 미루어 무덤의 주인공은 어린이로 추정되고 있다. 식리총도 봉황대고분의 남쪽 15.6m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금령총과 대략 비슷한 구조와 규모를 가진 것으로 밝혀졌는데, 분구는 동북-서남간에 장축을 두고 직경 약 30m·높이 6.5m이다. 적석부는 직경 11.6m·높이 70㎝-1m이며, 이 적석부내에 1.8m 깊이의 토광을 파고 적석곽을 설치하고, 그 안에 동북-서남 5.77m·남북 3.63m·높이 1.45m의 목곽을 설치한 것으로 보여진다. 출토유물로는 백화수피관모·은제요대·은제소환·금제이식·청동초두·칠기·철제무구류·마구류 등이 출토되었는데, 주목되는 것은 금관이나 금동관 은제관 등이 없는 대신 금동제신발(길이 35.6㎝, 너비 1.12㎝)이 발견되었는데, 고분에서 발견된 신발의 문양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것이다. 구갑상<龜甲狀>구획 안에 화염문·용·괴수·봉황·국화문 등을 질서있고 정교하게 배치하여 호화로움을 잘 나타내었다. 이러한 문양은 페르시아 등 중동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양식으로 실크로드문화유입을 연상케 한다. 금령총과 식리총은 봉황대고분과의 거리가 15.6m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등 같은 묘역내에 분포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대소고분 간에는 친연관계를 짐작할 수 있고, 두 소고분은 봉황대고분의 배총<陪塚>으로 보여진다.
경주분지 중심부인 노동동에 분포되어 있는 고분은 대형분으로 사적 125호 봉황대<鳳凰臺>고분·126호 식리총<飾履塚>·127호 금령총<金鈴塚>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봉황대고분은 단일고분으로서는 황남대총 다음으로 규모가 큰 고분인데, 분구의 저경 82m·높이 22m이다. 이외에 1924년 발굴된 금령총·식리총 등은 발굴 후 분구는 남아 있지 않으나, 초기에 발굴된 고분으로서 금제품 등 다양한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유명하다. 여기 고분들의 분구형태는 원형봉토분 형식이고, 내부의 매장주체시설은 적석목곽분의 구조형식이다. 금령총은 봉황대고분의 남쪽 근거리에서 발견되었는데, 분구는 거의 전부 삭평되고 서남부의 약간만 잔존하고 있었다. 발굴조사로 추측할 수 있는 규모는 저경 약 18-20m·높이 4-5m 정도의 소형 고분이다. 지표하 약 2m ·지면하 2m에 동서길이 3.1m·남북길이 2.7m·깊이 2.8m 정도의 광을 파고 바닥과 벽에 기대어 냇돌로 석곽을 만들고, 이 석곽 안에 동서 4.28m·남북 3.8m·높이1.82m 가량의 목곽(목실)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저경 10.5m 지면높이 1m 가량 되게 냇돌로 된 원방형<圓方形>의 적석부를 올렸다. 부장유물로는 금관·금제이식·금제팔지·금제요대·동제신발·철제솟·칠기·유리제완·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유물로는 백화수피제채화관모<白樺樹皮製彩畵冠帽> 7개·배형(주형<舟形>)토기·기마인물상<騎馬人物像>토기·방제백유경<倣製白乳鏡> 등이다. 금관의 규모가 작고 소형 방울이 있으며, 또 시체자리가 1m 정도밖에 안되는 소형인 점 등으로 미루어 무덤의 주인공은 어린이로 추정되고 있다. 식리총도 봉황대고분의 남쪽 15.6m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금령총과 대략 비슷한 구조와 규모를 가진 것으로 밝혀졌는데, 분구는 동북-서남간에 장축을 두고 직경 약 30m·높이 6.5m이다. 적석부는 직경 11.6m·높이 70㎝-1m이며, 이 적석부내에 1.8m 깊이의 토광을 파고 적석곽을 설치하고, 그 안에 동북-서남 5.77m·남북 3.63m·높이 1.45m의 목곽을 설치한 것으로 보여진다. 출토유물로는 백화수피관모·은제요대·은제소환·금제이식·청동초두·칠기·철제무구류·마구류 등이 출토되었는데, 주목되는 것은 금관이나 금동관 은제관 등이 없는 대신 금동제신발(길이 35.6㎝, 너비 1.12㎝)이 발견되었는데, 고분에서 발견된 신발의 문양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것이다. 구갑상<龜甲狀>구획 안에 화염문·용·괴수·봉황·국화문 등을 질서있고 정교하게 배치하여 호화로움을 잘 나타내었다. 이러한 문양은 페르시아 등 중동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양식으로 실크로드문화유입을 연상케 한다. 금령총과 식리총은 봉황대고분과의 거리가 15.6m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등 같은 묘역내에 분포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대소고분 간에는 친연관계를 짐작할 수 있고, 두 소고분은 봉황대고분의 배총<陪塚>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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