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구황동 103
이 탑은 이중으로 쌓은 기단< 基壇 >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 統一新羅時代 >의 전형적인 석탑< 石塔 >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탑신< 塔身 >과 옥개석< 屋蓋石 >은 각각 하나의 돌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1943년 이 탑을 해체수리< 解體修理 >하였을 때 제2층 옥개석내에 있었던 금동< 金銅 >으로 만든 사리함< 舍利函 > 속에서 금으로 만든 여래입상< 如來立像 >, 많은 유리구슬, 팔지, 금실 등이 발견되었다. 아울러 사리함 뚜껑 내면에 새겨둔 글자가 있어 이 탑에 대한 내용과 발견된 유물< 遺物 >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즉 이 탑은 신라 신문왕< 神文王 >이 그 11년(691)에 돌아가자 그의 아들인 효소왕< 孝昭王 >이 부왕< 父王 >의 명복< 冥福 >을 빌기 위해 그 이듬해(692)에 세웠으며 효소왕이 돌아가자 성덕왕< 聖德王 >이 그 5년(706)에 앞서의 두 왕을 위해 사리< 舍利 >, 불상< 佛像 > 등을 다시 넣고 아울러 왕실< 王室 >의 번영과 태평성세< 太平盛世 >를 기원한 것이다. 탑의 상륜부< 相輪部 >는 없어졌다. 높이는 7.3m이다.
이 탑은 이중으로 쌓은 기단< 基壇 >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 統一新羅時代 >의 전형적인 석탑< 石塔 >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탑신< 塔身 >과 옥개석< 屋蓋石 >은 각각 하나의 돌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1943년 이 탑을 해체수리< 解體修理 >하였을 때 제2층 옥개석내에 있었던 금동< 金銅 >으로 만든 사리함< 舍利函 > 속에서 금으로 만든 여래입상< 如來立像 >, 많은 유리구슬, 팔지, 금실 등이 발견되었다. 아울러 사리함 뚜껑 내면에 새겨둔 글자가 있어 이 탑에 대한 내용과 발견된 유물< 遺物 >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즉 이 탑은 신라 신문왕< 神文王 >이 그 11년(691)에 돌아가자 그의 아들인 효소왕< 孝昭王 >이 부왕< 父王 >의 명복< 冥福 >을 빌기 위해 그 이듬해(692)에 세웠으며 효소왕이 돌아가자 성덕왕< 聖德王 >이 그 5년(706)에 앞서의 두 왕을 위해 사리< 舍利 >, 불상< 佛像 > 등을 다시 넣고 아울러 왕실< 王室 >의 번영과 태평성세< 太平盛世 >를 기원한 것이다. 탑의 상륜부< 相輪部 >는 없어졌다. 높이는 7.3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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