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서악동 1006-1
김양은 신라 제45대 신무왕때의 공신이다.
836년 42대 흥덕왕이 죽자 왕위계승권자들인 균정과 제융 사이에서 왕위쟁탈전이 발생하였는데, 김양은 균정의 아들인 우징과 함께 균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제융과 김명의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장보고의 손을 잡은 후 우징과 함께 839년 정월에 장보고 휘하의 강병 5천을 이끌고 경주로 진격하여 대구에서 민애왕이 거느린 정부군과 격전을 별여 대승을 거두고 아울러 44대 민애왕인 김명(金明)을 살해한 후 우징(祐徵)을 신무왕(神武王)으로 즉위시켰다.
김양이 857년 8월 13일에 50세의 나이로 죽자 신무왕의 아들인 46대 문성왕(文聖王)은 부의와 렴장을 모두 김유신의 예에 따라 행하게 하였다. 그 해 12월 8일에 태종무열왕의 능열(降列)에 합장(陪葬)토록했다.
무덤의 외형은 일반적인 원형봉토분으로 별다른 특징은 보이지 않으나 비교적 큰 무덤이다.
김양은 신라 제45대 신무왕때의 공신이다.
836년 42대 흥덕왕이 죽자 왕위계승권자들인 균정과 제융 사이에서 왕위쟁탈전이 발생하였는데, 김양은 균정의 아들인 우징과 함께 균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제융과 김명의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장보고의 손을 잡은 후 우징과 함께 839년 정월에 장보고 휘하의 강병 5천을 이끌고 경주로 진격하여 대구에서 민애왕이 거느린 정부군과 격전을 별여 대승을 거두고 아울러 44대 민애왕인 김명(金明)을 살해한 후 우징(祐徵)을 신무왕(神武王)으로 즉위시켰다.
김양이 857년 8월 13일에 50세의 나이로 죽자 신무왕의 아들인 46대 문성왕(文聖王)은 부의와 렴장을 모두 김유신의 예에 따라 행하게 하였다. 그 해 12월 8일에 태종무열왕의 능열(降列)에 합장(陪葬)토록했다.
무덤의 외형은 일반적인 원형봉토분으로 별다른 특징은 보이지 않으나 비교적 큰 무덤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