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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흥덕왕릉 - 괘릉(掛陵)과 함께 능묘제도(陵墓制度)가 잘 갖추어진 신라 왕릉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

흥덕왕릉<興德王陵>은 괘릉<掛陵>과 함께 능묘제도<陵墓制度>가 잘 갖추어진 신라 왕릉<新羅 王陵>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왕과 왕비를 합장<合葬>하였다고 전한다. 능<陵>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0.8m, 높이 6m이며 봉토<封土> 밑에는 판석조<板石造> 호석<護石>을 둘렀다. 호석은 바닥에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판석<板石>으로 면석<面石>을 세우고 면석 사이에는 탱석<撑石>을 끼워 면석을 고정시켰다. 아울러 탱석<撑石>에는 각각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고, 그 위에는 갑석<甲石>을 올려 호석을 마무리하였다. 호석<護石>이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조각은 괘릉<掛陵>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 조각수법은 괘릉<掛陵>에 뒤진다. 호석의 주위로는 판석<板石>을 깔아 회랑<廻廊>을 설치하고 그 밖으로 돌난간을 세웠는데 난간<欄干> 석주<石柱>는 상하 두곳에 원공<圓孔>이 뚤려 관석<貫石>을 끼우는 형식이다. 현재 난간<欄干> 석주<石柱>는 없어진 것이 많다. 왕릉<王陵>의 외부에는 사우<四隅>에 석사자<石獅子>가 배치되었는데 이는 성덕왕릉<聖德王陵>의 석사자<石獅子> 배치와 같다. 능<陵> 앞으로는 문인석<文人石> 한쌍과 무인석<武人石> 한쌍, 석화표<石華表> 한쌍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왕릉<王陵>의 전방 좌측에는 능비<陵碑>를 세웠는데, 능비<陵碑>는 현재 귀부<龜趺>만 남아 있고 비신<碑身>과 이수<이首>는 없어졌다. 귀부<龜趺>의 조각 수법은 성덕왕릉<聖德王陵>의 귀부와 유사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왕릉은 성덕왕릉<聖德王陵>과 괘릉<掛陵>의 형식을 모방하여 건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장자인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在位> 826∼836)은 본명이 김수종(경휘)<金秀宗(景徽)>이고, 헌덕왕<憲德王>의 동생으로 왕비는 장화부인<章和夫人>이다. 재위기간에는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全羅南道 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장보고<張保皐>를 대사로 삼아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으며, 당<唐>으로부터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智異山>에 심게 하고 재배시켰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장지가 【안강북 비화괴<安康北 碑火壞>】이라고 하여 현재의 위치와 대체로 부합되며, 특히 왕릉의 주위에서 【흥덕<興德>】이란 명문의 비편<碑片>이 발견되어 이 능<陵>이 흥덕왕릉<興德王陵>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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