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197
이 가옥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서계< 西溪 > 박세당< 朴世堂:1629~1703 >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집필을 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서계< 西溪 >선생은 1629년(인조 7년)에 이조참판을 역임한 정< 炡 >과 양주 윤씨의 네째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 아버지가 죽고 편모 밑에서 원주·안동·청주·천안 등지를 전전하다가 13세에 비로소 고모부인 정사무< 鄭思武 >에게 수학하게 되었다. 그 후 31세인 1660년(현종 1)에 증광문과에 장원을 시작으로 예조좌랑·정언·병조정랑·지평·홍문관교리겸 경연시독관·함경북도병마평사 등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1668년 서장관< 書狀官 >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40세에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지금의 의정부시 장암동(당시는 양주 석천동)에 칩거하면서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저술, 그리고 제자양성에 매진하게 된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농사에 관하여 쓴 「색경< 穡經 >」이 있는데 이 책은 선생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글로서 남긴 책으로서 그 가치가 인정된다. 또한 고전연구에 관한 저술로서 「사변록< 思辯錄 >」등이 있다. 현재의 서계선생 사랑채는 당시 선생이 기거하며 저술활동을 하였던 곳으로 원래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진 조선후기의 사대부가의 규모를 하고 있었으나 6.25전란시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바깥 사랑채만 남게 되었다. 사랑채는 동측의 수락산을 배산< 背山 >으로 하고 서측 멀리 도봉산을 안산< 案山 >으로 하여 자리잡은 서향집의 좌향< 坐向 >을 하고 있어 보편적인 좌향인 남향이나 남서향, 그리고 남동향을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향< 向 >보다는 배산임수의 자연지세를 더욱 중요시하여 집의 배치를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채의 남측으로 약 10여미터 떨어져서 수락산으로부터 내려오는 계류가 흐르고 있는데 현재는 이 계류를 끼고 등산로가 조성되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평면규모로서 남측으로 날갯집 형식의 누마루가 덧붙여져 있는 '乙'자형의 평면구조를 하고 있다. 사랑방은 두칸 규모에 뒤쪽으로 반칸씩을 덧붙여 후원으로의 출입을 용이하게 하였고, 또한 좌측으로는 반칸규모의 다락으로 오르는 문을 내었고 다락 밑으로는 아궁이를 두었다. 두칸 규모의 사랑방 남동측으로 한칸규모의 온돌방이 있고 반칸 돌출하여 누마루를 마주하고 있는 마루방이 있는데 이 방과 누마루에서 주로 접빈객< 接賓客 >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누마루는 바닥면이 약 1자 반 가량 높고 삼면으로 머름을 둔 우물마루로 되어있다. 창호는 삼면 모두 머름 위에 사분합의 띠살문을 설치하였다. 이 누마루에 앉아 문을 열면 수락산과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류를 조망할 수 있어 자연과의 동화감을 느끼게 한다. 두칸 규모의 사랑방은 정면 즉, 서측으로 반칸의 퇴칸을 두고 있는데 하부에는 모두 머름을 설치하고 그 위로 2분합의 띠살문을 바깥쪽으로 달았고 그 내측으로는 정자살의 미닫이문을 이중으로 설치하였다. 이 방과 누마루를 마주한 방 사이에 정방형의 사랑대청이 한칸 반 규모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의 주칸은 한칸이 모두 2,480mm로서 8자로 가정하면 1자는 310mm로서 건립당시의 건물의 용척을 추정할 수 있다. 기단은 외벌대의 장대석 기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초석은 방형의 다듬돌 초석으로서 전체적으로 석재의 칫수나 가공수법이 장대하고 치밀하였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기둥은 모두 한변이 약180mm 가량되는 사각형의 방주로 치목되어 있다. 가구는 오량가의 민도리집으로서 화려하지는 않으나 매우 짜임새 있는 가구의 틀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기와는 약 10여년 전에 한식기와에서 재래식 기와로 번와하였다고 한다. 현재 당시의 한식기와가 사랑마당 앞에 쌓여져 있는데 막새기와는 보이지 않는다.
이 가옥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서계< 西溪 > 박세당< 朴世堂:1629~1703 >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집필을 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서계< 西溪 >선생은 1629년(인조 7년)에 이조참판을 역임한 정< 炡 >과 양주 윤씨의 네째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 아버지가 죽고 편모 밑에서 원주·안동·청주·천안 등지를 전전하다가 13세에 비로소 고모부인 정사무< 鄭思武 >에게 수학하게 되었다. 그 후 31세인 1660년(현종 1)에 증광문과에 장원을 시작으로 예조좌랑·정언·병조정랑·지평·홍문관교리겸 경연시독관·함경북도병마평사 등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1668년 서장관< 書狀官 >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40세에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지금의 의정부시 장암동(당시는 양주 석천동)에 칩거하면서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저술, 그리고 제자양성에 매진하게 된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농사에 관하여 쓴 「색경< 穡經 >」이 있는데 이 책은 선생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글로서 남긴 책으로서 그 가치가 인정된다. 또한 고전연구에 관한 저술로서 「사변록< 思辯錄 >」등이 있다. 현재의 서계선생 사랑채는 당시 선생이 기거하며 저술활동을 하였던 곳으로 원래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진 조선후기의 사대부가의 규모를 하고 있었으나 6.25전란시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바깥 사랑채만 남게 되었다. 사랑채는 동측의 수락산을 배산< 背山 >으로 하고 서측 멀리 도봉산을 안산< 案山 >으로 하여 자리잡은 서향집의 좌향< 坐向 >을 하고 있어 보편적인 좌향인 남향이나 남서향, 그리고 남동향을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향< 向 >보다는 배산임수의 자연지세를 더욱 중요시하여 집의 배치를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채의 남측으로 약 10여미터 떨어져서 수락산으로부터 내려오는 계류가 흐르고 있는데 현재는 이 계류를 끼고 등산로가 조성되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평면규모로서 남측으로 날갯집 형식의 누마루가 덧붙여져 있는 '乙'자형의 평면구조를 하고 있다. 사랑방은 두칸 규모에 뒤쪽으로 반칸씩을 덧붙여 후원으로의 출입을 용이하게 하였고, 또한 좌측으로는 반칸규모의 다락으로 오르는 문을 내었고 다락 밑으로는 아궁이를 두었다. 두칸 규모의 사랑방 남동측으로 한칸규모의 온돌방이 있고 반칸 돌출하여 누마루를 마주하고 있는 마루방이 있는데 이 방과 누마루에서 주로 접빈객< 接賓客 >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누마루는 바닥면이 약 1자 반 가량 높고 삼면으로 머름을 둔 우물마루로 되어있다. 창호는 삼면 모두 머름 위에 사분합의 띠살문을 설치하였다. 이 누마루에 앉아 문을 열면 수락산과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류를 조망할 수 있어 자연과의 동화감을 느끼게 한다. 두칸 규모의 사랑방은 정면 즉, 서측으로 반칸의 퇴칸을 두고 있는데 하부에는 모두 머름을 설치하고 그 위로 2분합의 띠살문을 바깥쪽으로 달았고 그 내측으로는 정자살의 미닫이문을 이중으로 설치하였다. 이 방과 누마루를 마주한 방 사이에 정방형의 사랑대청이 한칸 반 규모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의 주칸은 한칸이 모두 2,480mm로서 8자로 가정하면 1자는 310mm로서 건립당시의 건물의 용척을 추정할 수 있다. 기단은 외벌대의 장대석 기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초석은 방형의 다듬돌 초석으로서 전체적으로 석재의 칫수나 가공수법이 장대하고 치밀하였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기둥은 모두 한변이 약180mm 가량되는 사각형의 방주로 치목되어 있다. 가구는 오량가의 민도리집으로서 화려하지는 않으나 매우 짜임새 있는 가구의 틀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기와는 약 10여년 전에 한식기와에서 재래식 기와로 번와하였다고 한다. 현재 당시의 한식기와가 사랑마당 앞에 쌓여져 있는데 막새기와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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