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용인시 양지면 제일리 산37-1
조선 전기의 문신 정옥형(1486∼1549)과 정응두(1508∼1572)의 신도비이다. 이들 비는 고양군 지도읍 행신리에 세워졌다가 도시 계획으로 인해 1988년 10월 이곳으로 옮겨졌다. 정옥형은 중종<中宗> 8년(15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정랑<正郞>·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판서<判書> 등을 지냈는데, 형조판서 재임시 소윤<小尹>으로 대윤<大尹>의 제거에 협력하여 보익공신<保翼功臣>(조선 명종 때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 일파를 몰아낸 신하에게 내린 공신 칭호로 후에 삭탈되었다) 3등에 책록되었다. 신도비는 대석<臺石>·비신<碑身>·개석<蓋石>으로 이루어졌는데 석질이 사질화강암으로 물러서 마모가 심하다. 개석의 기왓골은 잘 새겨졌다. 비문은 홍섬<洪暹>이 짓고, 한호<韓濩>가 썼으며, 남응운<南應雲>이 두전<頭篆>을 했다. 정응두는 정옥형의 아들로 중종 29년 문과에 장원급제,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올랐다. 신도비는 대석·비신·개석의 간략한 형식이다. 비문은 남구만<南九萬>이 짓고 썼으며 최석정<崔錫鼎>이 두전을 했다.
조선 전기의 문신 정옥형(1486∼1549)과 정응두(1508∼1572)의 신도비이다. 이들 비는 고양군 지도읍 행신리에 세워졌다가 도시 계획으로 인해 1988년 10월 이곳으로 옮겨졌다. 정옥형은 중종<中宗> 8년(15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정랑<正郞>·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판서<判書> 등을 지냈는데, 형조판서 재임시 소윤<小尹>으로 대윤<大尹>의 제거에 협력하여 보익공신<保翼功臣>(조선 명종 때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 일파를 몰아낸 신하에게 내린 공신 칭호로 후에 삭탈되었다) 3등에 책록되었다. 신도비는 대석<臺石>·비신<碑身>·개석<蓋石>으로 이루어졌는데 석질이 사질화강암으로 물러서 마모가 심하다. 개석의 기왓골은 잘 새겨졌다. 비문은 홍섬<洪暹>이 짓고, 한호<韓濩>가 썼으며, 남응운<南應雲>이 두전<頭篆>을 했다. 정응두는 정옥형의 아들로 중종 29년 문과에 장원급제,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올랐다. 신도비는 대석·비신·개석의 간략한 형식이다. 비문은 남구만<南九萬>이 짓고 썼으며 최석정<崔錫鼎>이 두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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