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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성덕왕릉 - 최초로 완비된 형태를 갖춘 통일신라 시대의 왕릉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 8

경주시에서 불국사로 가는 도중 오른쪽으로 조양동 소재 내동초등학교가 있고, 왼쪽의 철길 넘어선 곳에 울창한 송림이 있으며 그 곳에 2기의 왕릉이 있다. 앞에 있는 원형분은 효소왕(32대)의 능이라 전해지며 능을 지나면 바로 뒤에 성덕왕의 능이 있다.
신라 33대 성덕왕의 능이라고 전해지는 이 원형분은 분구(憤丘)의 언저리에 높이 90cm 정도의 판석을 두르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다. 판석들 사이에는 탱주(撑株)를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석재를 세워 보강하였다.

이 삼각형 석재들 사이에 환조(丸彫)의 십이지상을 추가로 배치하였다. 십이지상들은 모두 방형의 기단위에 올려져 있는데 심하게 파손당하였다. 또 중간 바닥에도 판석을 깔았으며 가장 바깥 쪽에는 석주로 난간을 둘렀는데 파괴가 심하여 후에 보수해 두었다. 능의 앞쪽에는 석상(石床, 혼유석)이 놓였는데 2매의 판석으로 조립하였으며 사방의 면에는 안상을 조각해 두었다.
능의 네 모퉁이에는 돌사자를 배치하였고 능의 앞쪽에는 문인석 2구, 무인석 2구를 좌우에 세운 것으로 예상되나 현재는 문인석으로 추정되는 1구와 형체를 알 수 없는 석인상이 상반신만을 남기고 있다.
능 전방 100m 왼쪽 앞의 전답 가운데는 경덕왕 13년(1754년) 정월에 세워진 능비(陵碑)를 떠받치고 있었을 귀부가 남아있는데 심하게 파손되어있다.

현재 이 능에 묻힌 피장자에 대해서 알려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보이고 있는 전체적인 조각기법들은 통일신라 초기의 양식에 속하며 통일신라 시대의 왕릉으로서는 최초로 완비된 형태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1972년 3월 23일 6시에 도굴꾼들이 뚫은 도굴갱이 관리인 함문학(당시 55세)씨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였다. 당시 상황을 함씨의 증언에 의하면 도굴꾼들이 왕릉 봉토 위 남쪽 지점의 잔디를 원형으로 직경 80cm 가량 교묘하게 떼어 놓고 밤새 작업을 하다가 날이 밝아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일제시대인 1935년에도 도굴당한 바가 있다.)

※성덕왕(聖德王, ?~737)

신라 제33대왕, 제위 702∼737, 성은 김(金)씨, 이름은 본래 융기(隆基)였으나 뒤에 흥광(興光)으로 고쳤다. 31대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32대)의 아우이다.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비로서 전비(前妃)는 704(성덕왕 3)에 승부령(乘府令)이던 소판(蘇判) 김원태(金元太)의 딸인 성정왕후(成貞王后, 혹은 嚴貞王后)를 맞아 들였으나 성덕왕 15년에 왕궁에서 내보내고 이찬(伊餐) 김순원(金順元)의 딸 소덕왕후(炤德王后)를 계비로 맞이하여 후대인 34대 효성왕(孝成王), 35대 경덕왕(景德王)에 이른다. 성덕왕대는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정치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우선 정치적으로 국가의 행정을 담당하는 집사부(執事部)의 중시(中侍, 오늘날의 장관)가 일체 책임을 지는 전제왕권을 보다 강화하였다. 그리고 711년에는 왕비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군사에게 제시하였으니 이른바 전제왕권하에서 신하가 지켜야 할 계명을 강조한 충군사상(忠君思想)일 터이다. 뿐만 아니라 귀족회의의 대표자였던 상대등(오늘의 수상격)의 활동을 위축시키므로 귀족세력을 약화시켜 정치적으로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국내의 정치안정을 기반으로 일본국과 당나라 등에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치면서 중국문물의 수입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한편 이러한 기운은 경덕왕(742∼765) 때까지 계속되어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과 같은 위대한 문화적 업적을 낳았다. 그러나 바로 이 무렵부터 신라 전제 왕권은 동요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혜공왕(765∼780) 때에는 귀족들의 반란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왕은 시해당하게 되고 뒤이어 즉위한 선덕왕(780∼785)대에 이르면 전제왕권의 시기가 끝나고 진골귀족들의 연립정치가 시작되는 신라 하대(下代) 즉 신라쇠망기에의 진입을 예고하게 된다. 737년(재위 36)에 사망후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차사(移車寺)의 남쪽에 장사 지냈다.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제8, 성덕왕조에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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