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구정동 산 41
통일신라시대의 고분으로 이미 도굴을 당한 뒤인 1920년 일본인들의 학술조사를 통해 내부구조가 밝혀졌고 이때 금동관 장신구, 은제행엽(銀製杏葉) 등이 출토되었다.
그후 방치되어 갑석, 연석, 호석, 지대석 등이 도괴되고 유실되었으며 봉토층 또한 낙토가 심하여 정상 중심부에 있는 천정석이 노출되었고 이로 인해 강우기에는 누수가 심하였다.
1964년 복원시에는 남편의 지대석은 전부 없어졌고 동,서,북쪽 일부만이 지표위에 남아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호석인 십이지신상은 전부 남아있었다. 그 중 양의 모습을 한 미상(未像)만 얼굴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었다.
봉분은 평면형태가 정사각형으로 된 토분으로 한변의 길이가 9.5m, 높이 약 3m이며 봉분아래에 호석을 설치하였다.
호석은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아 면석으로 하고 네 귀에는 우주를 세웠으며 무사의 옷을 입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탱석을 각 변마다 세개씩 배치하였으며 면석과 탱석 위에는 갑석을 덮었다.
묘실은 봉분 남쪽으로 치우쳐 직사각형의 십자형으로 축조된 횡혈식석실인데 역시 장대석을 갈았다. 묘실 동벽에서 잇달아 남쪽으로 연도가 나있고 묘실 서벽 가까이에 안상문이 새겨진 관대가 석치되었다.
이와같은 네모 무덤은 신라고분으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그 계통을 정하기 어려우나 그 구조와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얼마되지 않은 십이지상 둘레돌을 갖춘 고분으로 중요하며 경남의 거창, 진주 등지에 나타나는 고려 전기의 둘레돌을 같춘 네모무덤에 영향을 준 선구적인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고분으로 이미 도굴을 당한 뒤인 1920년 일본인들의 학술조사를 통해 내부구조가 밝혀졌고 이때 금동관 장신구, 은제행엽(銀製杏葉) 등이 출토되었다.
그후 방치되어 갑석, 연석, 호석, 지대석 등이 도괴되고 유실되었으며 봉토층 또한 낙토가 심하여 정상 중심부에 있는 천정석이 노출되었고 이로 인해 강우기에는 누수가 심하였다.
1964년 복원시에는 남편의 지대석은 전부 없어졌고 동,서,북쪽 일부만이 지표위에 남아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호석인 십이지신상은 전부 남아있었다. 그 중 양의 모습을 한 미상(未像)만 얼굴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었다.
봉분은 평면형태가 정사각형으로 된 토분으로 한변의 길이가 9.5m, 높이 약 3m이며 봉분아래에 호석을 설치하였다.
호석은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아 면석으로 하고 네 귀에는 우주를 세웠으며 무사의 옷을 입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탱석을 각 변마다 세개씩 배치하였으며 면석과 탱석 위에는 갑석을 덮었다.
묘실은 봉분 남쪽으로 치우쳐 직사각형의 십자형으로 축조된 횡혈식석실인데 역시 장대석을 갈았다. 묘실 동벽에서 잇달아 남쪽으로 연도가 나있고 묘실 서벽 가까이에 안상문이 새겨진 관대가 석치되었다.
이와같은 네모 무덤은 신라고분으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그 계통을 정하기 어려우나 그 구조와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얼마되지 않은 십이지상 둘레돌을 갖춘 고분으로 중요하며 경남의 거창, 진주 등지에 나타나는 고려 전기의 둘레돌을 같춘 네모무덤에 영향을 준 선구적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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