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10-2
연산군이 자신의 유흥지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세운 비로 금천군 이변의 묘역을 보수할 때 출토되었는데 상단과 하단의 좌측 일부가 떨어져 있다. 비 앞면에 '금표내범인자론기훼제서율처참<禁標內犯人者論기毁制書律處斬>[금표 안으로 침범하는 자는 제서(왕명)의 법률을 버리고 헐었음을 논하여 처참한다]'라고 새겨져 있다. 연산군 10년(1504) 고양군이 왕의 유흥지가 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다시 고양군으로 복귀되었으므로, 이 금표비가 연산군 때의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금석문<金石文>으로 희귀한 예일 뿐만 아니라 문헌의 사실을 고증해 주는 귀중한 예이다.
[승용차]
서울에서 통일로를 이용하여 파주방향으로 오다가 관산동 가장동마을에서 우회전 간촌마을을 통과해 고은마을방향으로 좌회전하여 30m가량 들어가면 된다.
[대중교통]
구파발에서 금촌-파주행 버스를 타고 20분정도 가다가 관산동 가장동마을 앞에서 하차.
고양동방향으로 약1km걸어서 경기축산 농장입구의 금천군 묘역에 세워져 있다.
연산군이 자신의 유흥지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세운 비로 금천군 이변의 묘역을 보수할 때 출토되었는데 상단과 하단의 좌측 일부가 떨어져 있다. 비 앞면에 '금표내범인자론기훼제서율처참<禁標內犯人者論기毁制書律處斬>[금표 안으로 침범하는 자는 제서(왕명)의 법률을 버리고 헐었음을 논하여 처참한다]'라고 새겨져 있다. 연산군 10년(1504) 고양군이 왕의 유흥지가 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다시 고양군으로 복귀되었으므로, 이 금표비가 연산군 때의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금석문<金石文>으로 희귀한 예일 뿐만 아니라 문헌의 사실을 고증해 주는 귀중한 예이다.
[승용차]
서울에서 통일로를 이용하여 파주방향으로 오다가 관산동 가장동마을에서 우회전 간촌마을을 통과해 고은마을방향으로 좌회전하여 30m가량 들어가면 된다.
[대중교통]
구파발에서 금촌-파주행 버스를 타고 20분정도 가다가 관산동 가장동마을 앞에서 하차.
고양동방향으로 약1km걸어서 경기축산 농장입구의 금천군 묘역에 세워져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