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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손묘역석물 - 정창손과 그의 부인의 묘역

by 넥스루비 2007. 8. 7.
경기 양평군 양서면 부용1∼2리 산 37-1

정창손(1420∼1487)은 조선 세조<世祖>∼성종<成宗>에 이르는 3대 조정에서 15년간 재상을 역임하였다. 세조 때 좌익공신<佐翼功臣>(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일에 협력한 사람에게 내린 공신 칭호) 2등, 예종<睿宗> 때 익재공신<翊載功臣> 3등, 성종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조선 성종 때 임금을 도와 정치를 잘 하였다는 공으로 내린 공신 칭호) 2등으로 세 공신에 책훈되었으며 중종<中宗> 때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었다. 또한 『고려사<高麗史>』·『세종실록<世宗實錄>』등 각종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다. 정창손의 묘역은 원래 광주 방제동에 있었는데, 사후<死後> 연산군<燕山君> 10년(1504) 폐비 윤씨<廢妃尹氏> 사건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副棺斬屍>되고 신도비<神道碑>와 석물이 함께 파손되었다. 중종 원년(1506)에 바로 신원<伸寃>되어 개장<改葬>하고 석물을 다시 세웠으며, 인조<仁祖> 원년(1623)에는 신도비를 다시 세웠다. 한편 그와 부인의 묘역은 2기의 묘역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원래의 소재지인 방제동이 도시 개발되어 종중에서는 1970년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 이 때 하나의 봉분으로 합장하고 이전의 석물과 새로 제작한 석물을 함께 배치하였다. 이에 따라 묘역의 모습이 심하게 변하였고 석물은 묘비 2기, 문인석 2쌍, 신도비 1기가 남았다. 부인의 묘비는 개석<蓋石>이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양식인 화관석<花冠石> 형태로 세조 2년(1456)∼성종 17년(1487)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묘비는 월두형<月頭形> 비신<碑身>을 기대<基臺>에 꽂아 세우게 된 것으로 중종 원년에 건립한 것이다. 문인석 2쌍은 모두 조선 전기의 양식인 복두<복頭>를 쓰고 공복<公服>에 홀<忽>을 든 형상이며 그의 묘역에 있던 것이다. 신도비는 월두형 비신·기대·기대를 받치는 대좌<臺座>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의 신도비는 서거정<徐居正>이 찬<撰>하여 성종 19년에 세웠다. 연산군 10년에 파손되어 중종 원년 개장할 때에도 유독 신도비만은 복원되지 못하였다가 한준겸<韓逡謙>이 서거정의 비문에다 덧붙여 쓰고 비문을 써서 인조 원년에 다시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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