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2-1
조선 전기의 문신 문정공 한계희<韓繼禧>(1423∼1482)의 신도비로 영장산의 문정공 묘역에 있다. 이 곳에는 그의 큰아들 한사문<韓斯文>의 신도비(1508년)를 위시한 후손들의 묘비가 여럿 전한다. 한계희는 세종<世宗> 29년(1447)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성종연간<成宗年間>에 활약하여 벼슬이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는데, 특히 세조<世祖>의 신임을 받았으며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비문에는 이러한 그의 행력<行歷>과 성품 및 자손에 대해 적혀 있는데, 비문은 그의 친구 서거정<徐居正>이 지었고 안침<安琛>이 썼다. 글씨는 송설체이다. 비는 대석<臺石>·비신<碑身>·개석<蓋石>으로 되었는데, 대석 옆면에 안상<眼象>을 새기고 윗면에 연꽃 무늬를 새겨 장식했다. 개석은 연잎을 엎어 놓은 모습으로 조선 초 위패형 비석의 전형을 따랐다.
조선 전기의 문신 문정공 한계희<韓繼禧>(1423∼1482)의 신도비로 영장산의 문정공 묘역에 있다. 이 곳에는 그의 큰아들 한사문<韓斯文>의 신도비(1508년)를 위시한 후손들의 묘비가 여럿 전한다. 한계희는 세종<世宗> 29년(1447)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성종연간<成宗年間>에 활약하여 벼슬이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는데, 특히 세조<世祖>의 신임을 받았으며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비문에는 이러한 그의 행력<行歷>과 성품 및 자손에 대해 적혀 있는데, 비문은 그의 친구 서거정<徐居正>이 지었고 안침<安琛>이 썼다. 글씨는 송설체이다. 비는 대석<臺石>·비신<碑身>·개석<蓋石>으로 되었는데, 대석 옆면에 안상<眼象>을 새기고 윗면에 연꽃 무늬를 새겨 장식했다. 개석은 연잎을 엎어 놓은 모습으로 조선 초 위패형 비석의 전형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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